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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항일무장투쟁 발자취를 따라서] 海平 이재현 열사는 누구

[항일무장투쟁 발자취를 따라서] 海平 이재현 열사는 누구

해평 이재현 열사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독립운동을 위해 김구 선생과 함께 상하이로 간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3살이던 그에게 독립운동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의 호 해평(海平)은 김구 선생이 지어줬다. 김구 선생은 젊은 군인 이재현 열사를 총애했다. 해평 선생은 1939년 11월, 23살의 나이로 30여명의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과 함께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이하 전지공작대)를 창설했다.

   

전지공작대는 결성과정에서 김구 선생의 승인을 받았지만 임시정부와는 별도의 독자적 조직체였다. 그는 일본군 37사단과 맞서 정보를 빼내고 한국 국적의 일본군 사병을 포섭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중국인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8개월간 온몸을 씻지 않고 뙤약볕에 살갗을 태웠다고 한다. 중국 시골 청년 행세를 하며 일본군에 접근하기도 했다.

최정예부대였던 전지공작대는 41년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의 제5지대로 편입됐다. 이후 그는 45년 OSS부대(미전략사무국이 훈련시킨 광복군 부대)에서 무선반 조교활동을 하며 일본군 공습을 준비했고, 광복 후 46년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백마부대에서 정보대장으로 근무한 데 이어 조선민족청년단 서무과장으로 일했다. 63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독립운동의 유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지만 이듬해 외국 망명생활을 하다가 73년 재입국했다. 만국 공통어인 에스페란토 한국어 사전을 한국 최초로 집필하기도 했다. 향년 81세의 나이로 97년 작고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기만 했어도 잘 살 수 있었다. 박전대통령은 해방 직전 일본군이었던 이유로 귀국이 힘들자 해평 선생을 찾아와 부탁해 귀국할 수 있었다.

3·1절 기념식장에서 만난 박전대통령이 간절히 만나기를 애원하였으나 끝내 뿌리치고는 만나주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광복군으로 조국을 위해 일했어도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해평 선생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뜻을 지킨 올곧은 지사였다.

   

〈베이징|이고은기자〉

   

원본 위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8141813181&code=210000&s_code=af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