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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항일무장투쟁 발자취 따라서] 방치된 항일 유적들

경향신문 2006년 특집기사

   

[항일무장투쟁 발자취 따라서] 방치된 중국내 유적들l

입력 : 2006-08-13 18:39:45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다. 기억하지 않고, 묻지 않는다면 역사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중국에서 펼쳐진 항일무장투쟁 역사도 우리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역사가 될 수 없다. 경향신문은 광복 61주년을 맞아 방치된 중국 내 항일투쟁 유적지 답사를 통해 묻혀가는 독립투사들의 조국혼을 되새기고자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와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가 각각 주최한 이번 답사에는 경향신문 취재팀 외에 독립투사 후손과 역사학자,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중국 젊은이들이 몸을 흔드는 디스코장으로 변한 훈련장, 폐허만 남은 숙소….

빛나던 중국 내 항일 무장 투쟁의 역사 유적지가 하나 둘씩 사라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후손들의 걸음에는 장탄식이 뒤따랐다.

   

"아~, 이곳이 마지막 항일투쟁의 현장이라니…."

   

광복된 조국의 모습을 그리며 신산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항일투사의 숨결은 60여년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지나간 세월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중국 옌안(延安) 근교 뤄지아핑(羅家坪). 누런 색깔에 때가 잔득 묻어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 표면에는 붙여놓았다가 떼어낸 종이 자국이 덕지 덕지 붙여 있다.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구지'라고 적혀있다. 1945년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군이 세운 항일군정학교가 있던 자리다.

   

비석 뒷편으로 난 좁은 산길은 광복투사들이 머물렀던 토굴로 이어진다 나라 잃은 설움을 비수처럼 가슴에 꽃고 훈련을 받은 뒤 고단한 다리를 쉬었던 곳이다. 그러나 토굴 내부는 흙더미가 들어찼고 외벽에는 낡은 창틀만 남아 있어 스산함을 더했다.

   

중국 옌안 근교 나가평에 위치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근처 숙소. 김두봉 등 독립운동가가 머물렀던 이곳은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옌안에서 기차로 8시간거리에 있는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의 주둔지가 있었던 곳인데 이곳 사정도 옌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둔지 건물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는 양곡창고가 비스듬하게 서 있다. 지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가택지에는 현지 중국인이 새로 집을 지어버렸다.

당시 광복군 활동을 기억하는 루펑주씨(83)는 "사냥개를 유난히 사랑하던 이장군의 따뜻했던 모습이 어렴풋하나마 생각난다"면서 "광복군들이 돌아간 이후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현지 주민들의 증언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안에는 세계2차대전 중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이 OSS(Office Strategic Service) 훈련을 받았던 장소가 있다. 이 훈련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사찰 미타고사(彌陀古寺) 근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한결 찾기가 쉽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광복군의 훈련 장소임을 알리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시안 내 시뻬이대학. 1941년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던 한국청년훈련반의 훈련장소였던 대학교 내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활동했던 선친을 둔 이형진씨(53)는 "옌안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버님의 훈련지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평생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현장에 와보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진다"고 울먹였다.

   

한국 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는 부양시내. 광복군 3지대원들이 '탈출기'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던 자리에 지금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이 들어서 있다.

시안에서 기차로 하루 넘게 걸리는 부양(阜陽)엔 1945년 6월 당시 한국 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다. 현재 이곳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으로 변모했다. 보기에도 요란한 DISCO란 영문글자가 크게 씌어진 이곳 역시 팻말이나 표지판 하나 없다. 시내 큰길가에 놓인 디스코장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중국인들은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탐방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시안의 반대쪽에 있는 난징의 상황도 후손들의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의열단이 만든 군사정치학교가 훈련장으로 활용하던 천녕사는 폐가처럼 방치돼 있었다. 인근 채석장에서는 발파작업으로 끊임없이 폭파음이 들려왔고, 벽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산불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흉물스럽게 적혀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독립의 일념 하나로 젊음을 바친 조선청년들의 흔적이 난징의 산중턱에서 그렇게 또하나 스러져가고 있었다.

난징 시내에 위치한 민족혁명단의 거점지 호가화원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다. 1935년 4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한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과 민족혁명단 인사들이 6년동안 거주했던 호가호원은 현재 빈민촌으로 변해있어 제대로 찾아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대학원생 고호씨(29)는 "남의 땅에서 항일운동을 해야했던 역사도 서러운데 이렇게 잊혀져 가는 중국 항일투쟁지가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씨는 "지금은 중국까지 찾아오는 후손들이 있지만 2~3세대가 지나면 이곳이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항일무장투쟁 발자취를 따라서] . 좌파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소회

"미안합니다. 한국말을 하지 못해서. 한국말을 배우려해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항일투사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가운데)와 운암 김성숙의 아들 두건(왼쪽), 두련씨가 13일 베이징에서 만나 선친에 대한 추억과 좌파 광복운동가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3일 베이징에서 만난 고영광씨(69)는 거듭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고씨는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김산의 아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세로줄무늬 흰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셔츠 주머니에 볼펜이 제대로 꽂혀 있는데도 자꾸만 매만졌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버지는 저처럼 오래 사시지 못했죠"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김산은 고씨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38년,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33살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마흔이 다 되도록 친부에 대한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아버지로 인해 아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들의 성을 친부가 아닌 재혼한 중국인의 것을 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 전체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나서 오히려 많이 힘들었다"면서 "훌륭한 항일운동가인 아버지가 중국과 한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씨는 1978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조직부에 김산의 명예회복 조사를 요구했다. 6년여간의 공방 끝에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아버지의 철학과 열정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저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분들도 아버지에게 관심을 쏟아주셔서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직업을 묻자 그는 "국가경제무역위원회 과학기술부 부국장을 지냈고 8년 전 퇴직했다"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다른 중국인들보다 유난히 검은 피부여서 굴곡 많은 인생역정을 경험했을 법했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다만 미소를 지으며 "괜찮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광복 60년 만에 정부에서 김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기 때문. 당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수여하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일이라는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2년에 걸친 그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었다.

"이념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서훈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항일투쟁으로 서훈을 받으셨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죠."

두건(72), 두련(61)씨 형제는 광복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후손이다.

두씨 형제는 운암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만난 중국여성 두혜련과 사이에서 난 3남중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다. 두혜련은 운암 선생이 한국으로 떠난 뒤 아들들의 성을 자기 성씨로 바꿨다. 두건씨는 중앙미술학원 유화학부 부학부장을, 두련씨는 국가정보원센터 부주임을 각각 거친 뒤 퇴직했다.

두건씨는 "언제나 등잔불을 켜고 늦게까지 글을 쓰시던 바쁜 분이셨지만, 시간이 나면 우리와 함께 연을 띄우고 수영을 가르쳐 줄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아버지를 회상했다. 그가 12살이던 1945년 조선은 광복을 맞았고 운암 선생은 그해 12월 광복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안고 조선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귀국한 뒤 우리 가족은 정말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민족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을 곁에서 보아왔기에 한국에서 이상을 실현하고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정말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고난은 정작 해방 이후부터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운암은 귀국후 임시정부의 미군정 참여에 반대하며 반소·반미 운동을 벌이다 1946년 미군정법 위반으로 6개월간 전주감옥에 수감됐다. 또 1957년에는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61년에는 5·16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국가 행위자로 체포됐다가 독립유공자임이 감안돼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했다.

운암은 1969년 4월12일 71세를 일기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극빈한 삶으로 인해 병원비는커녕 임종한 뒤 퇴원비조차 없었던 쓸쓸한 죽음이었다.

두건씨는 "아버지의 사회주의 신념과 정치적인 사상, 관념 등이 귀국 후 다른 통치자들이나 집단과 갈등을 일으켜 정작 그 분의 항일업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열정을 바쳐 조선광복만을 원했던 아버지의 인생이 저토록 고난스럽게 끝이 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중국도 문화대혁명 등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저술하신 책이나 사료 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서 "가능하다면 한국과 중국 정부가 협의해 관련 사료를 발굴하는 데 힘썼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두건·두련 형제는 지난 1990년과 1992년 각각 전시회와 학술행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두 형제는 "아직까지 한국에 남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가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서 "한국에서 초청해 준다면 언제든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장소들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베이징|이호준기자〉

   

◇ 15세때 독립투신 김산

님 웨일스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독립 운동가였다. 1905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5세 때 만주 독립군훈련소에 입소한 뒤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때 김충창(운암 김성숙의 다른 이름)의 지도를 받아 사회주의자가 됐다. 1935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다.

   

1937년엔 항일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했다. 이때 님 웨일스를 만나 인터뷰 형식의 '아리랑'이 탄생했다. 이 책에서 김산은 "천부적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로 묘사됐다.

그러나 1938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체포된 후 극비리에 총살당했다. 가족들의 청원에 따라 46년만인 1984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명예가 회복됐다. 정부는 지난해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서훈했다.

   

◇ 좌파 정신적 스승 김성숙

   

운암 김성숙은 김산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1916~18년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성숙(星淑). 운암은 1919년 3·1운동때 경기 양주(楊州)의 광천시장 시위 주모자로 체포돼 1년간 복역했다. 1923년 중국으로 넘어가 '창일당'을 조직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반제동맹에 가담했고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중·일전쟁 이후 우리나라 항일광복운동의 우파인 김구계와 좌파인 김원봉계 통합에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통합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했고,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조현철기자〉

   

원본 위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8141807151&code=210000&s_code=af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