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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에도 없는 마을, 21일 오전 현지 가이드가 다섯 번이나 차를 세우고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 홍성촌(紅星村).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추가가(鄒家街·쩌우자)로,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등 이회영 일가 6형제 가족과 권속 60여 명은 1910년 12월 서울을 출발,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단둥을 거쳐 1911년 2월 초순 이곳에 도착했다.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정승만 9명을 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세가 형제들이 서울 명동의 땅을 비롯한 재산을 급히 처분하고 새봄을 만주에서 맞기로 한 이유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이회영 일가는 무관양성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아 일가가 추가가에 제대로 정착도 하기 전인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신흥강습소를 개교했다. 올해가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인 셈이다.
신흥강습소는 1년여 뒤 합니하로 이전하면서 16개 교실 규모로 커졌고, 다시 고산자로 옮기면서 신흥무관학교가 됐다. 1920년 폐교할 때까지 적어도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에는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장지락(김산)도 있다.
3·1운동 뒤엔 지청천, 이범석 등이 교관을 맡았고, 졸업생들은 의열단, 서로군정서, 통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세력의 근간이 됐다. 이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0년 중경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창설에도 큰 역할을 하는 등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확실치 않은 최초 신흥강습소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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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꾸린 7기 독립정신답사단 일행 100여 명과 함께 찾아간 추가가는 수퍼마켓 하나 없는 전형적인 중국 농촌마을이었다. 싼위안푸(三源浦) 중심가에서 차로 좁은 도로를 달려 40분, 마을 입구에서 다시 걸어서 15분을 들어가니 산이 하나 보이고, 그 입구에 넓은 마당이 딸린 단층 건물이 있었다. 현재는 기와공장으로 쓰이고 있어서 마당엔 부서진 기와와 벽돌조각이 쌓여 있었다.
이 건물이 서 있는 자리가 추가가에 처음 개교한 신흥강습소가 있던 자리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생도 40여 명이 신흥강습소에서 숙식했다는 것과 이 마을 내에 그만한 다른 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건물 뒤편에 강습소 생도들이 야영훈련을 했다는 대고산이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나 신흥강습소가 이 건물 훨씬 뒤편에 있었다는 현지 주민의 증언이 있어 단정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번 답사단 부단장을 맡은 김삼웅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전 독립기념관장)는 "이회영 일가가 이 마을에 정착했고, 신흥강습소가 이 일대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신흥강습소 위치에 대한 아무런 기념물이 없어서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이회영 일가가 살았던 집들도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동안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부족했던 현실이 그대로 확인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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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증손녀 "자랑스럽지만, 고초 생각하면 안타까워"
주로 대학생으로 이뤄진 답사단원들은 이 터에서 선열들에 대한 묵념을 하고 이내 발랄함을 되찾았다. 답사단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밝은 표정으로 건물과 대고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쉽사리 밝은 표정을 짓지 못하는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우당 이회영의 증손녀 이혜윤씨였다.
이씨는 "증조부께서 이렇게 이정표에도 없는 곳, 차 타고 찾아오기도 힘든 곳에 6형제 일가족을 다 끌고 오셨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유를 털어놨다.
이씨는 "요즘 사람들 뿐 아니라 당시에도 자신의 목숨, 자기 가족의 목숨과 안녕을 가장 중시했을 것 같은데, 요즘 돈으로 600억 정도의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오신 것에 대해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이곳에서 하셨을 고생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말대로 서울에선 권문세족이었던 이회영 일가가 이곳 서간도 추가가에서 겪은 고생은 참담했다. 이미 거주하고 있던 한족들의 반발로 땅과 집을 구입하는 데 큰 애로를 겪은 것은 물론 마적떼의 습격까지 받았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1913년 음력 10월 20일 새벽 습격한 마적떼에게 총을 맞아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40일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위안스카이와의 교분 덕분에 '만주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석영은 신흥강습소 생도 2명과 함께 마적떼에 납치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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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이주민들은 혹독한 추위와 사나운 바람, 만주열과 같은 풍토병에 시달렸다. 이시영의 손자 남매는 수수밥을 먹다가 배탈이 나 사망했고, 형편이 나쁘지 않을 때에도 주식은 강냉이 밥이었다.
큰 재력을 가진 이유원의 양자로, 신흥무관학교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이석영은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부지매입과 건축에 남은 가산을 다 쏟아부었다. 이석영은 1920년대부터 말할 수 없는 가난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회영 또한 1932년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 목적을 갖고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갔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지독한 고문 끝에 그해 11월 옥사했다. 답사 첫째날인 19일 다롄 뤼순형무소(여순감옥)에서 이회영이 갇혀있던 감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혜윤씨는 원망스런 마음도 털어놨다. 이씨는 "중국은 자기네 역사도 아닌데 동북공정을 하면서 고구려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려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기도 힘들게 방치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이념, 학생봉기 우려해 무장투쟁 교육 무시"
이회영 일가의 희생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회영 일가는 독립기지 건설에 많은 자금을 댔지만, 주로 2선에서 뒷바라지 하는 역할을 맡았고 책임을 지고 감투를 쓰는 자리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사료에서 이름이 자주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김 전 관장은 "또 1세대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식민사관 교육을 받아 무장투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실력양성론쪽을 집중조명 한 탓도 있다"며 "특히 독재정권 하에서는 학생들의 봉기가 두려워 항일 무장투쟁 부분은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이념적으로도 좌파나 무정부주의 무장투쟁에 대해선 일부러 무시해 온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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