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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패치 디스, 황색언론 딱 거기까지 [ 한겨레21 ]

‘디스패치’ 디스, 황색언론 딱 거기까지
하니Only
톱스타 연예인과 재벌가 장녀의 열애설을 신년기획으로 단독 보도한 디스패치. 디스패치 화면 갈무리

[한겨레21] 레드 기획
팩트 중심주의로 가장한 선정주의 보도에 대중이 환호하는 사이
공적으로 중요한 것은 묻히고 잊혀져가

김완 <미디어스> 기자 

시대는 변화하고 기술의 진화는 더 대단하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이라고 하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원형적 합의는 비교적 굳건하게 유지되는 듯 보인다. 어느 사회건 저널리즘은 ‘공적으로 중요하거나 관심사가 되는 현재의 일들을 규칙적으로 생산하고 배포하는 사업 또는 행위’(<뉴스의 사회학>, 마이클 셔드슨 지음, 이강형 옮김, 한국언론진흥재단 펴냄)로 이해된다. 

물론 뜯어보면 대립적인 전제가 맞서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조건이 나열되어 있는 규정이다. 전제와 조건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언론이라는 사업집단의 양상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무엇을 언론 행위라고 부를 것이냐의 문제 역시 ‘규칙성’과 ‘생산과 배포’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업’과 ‘행위’ 역시 이해관계와 가치의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단 점에서 서로 다투는 개념들이다. 

  

‘관심사가 되는 것’만을 좇는다, 철저히 

그렇다면 거두절미하고 따져보자. 지금 여기 존재하는 <디스패치>라고 하는 집단은 어떠한가. <디스패치>는 ‘연예전문 온라인 신문’을 표방한다. 온라인을 통해 현재의 일들을 규칙적으로 생산하고 배포하며, 스스로를 언론 행위자로 정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도 그들의 행위를 ‘언론’이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이에 대해 디스패치는 2014년 4월 김연아 스토킹 논란이 일었을 때, ‘대한민국에서 저런 취재가 통하겠어?’라는 의문이 ‘대한민국에 이런 매체도 있어야지’ 하는 지지로 바뀌었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놀라울 정도로 간과되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공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디스패치>는 철저히 ‘관심사가 되는 것’만을 좇는다. 공적으로 중요한 것을 관심사로 인식하는 것과 공적으로 중요한 것과 관심사가 되는 것을 구분하는 인식의 격차는 엄청나다. 그 차이는 경우에 따라 언론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 언론으로서의 디스패치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우선, 이 지점에 집중될 필요가 있다. 

'디스패치'는 카메라가 모인 곳을 향하기보다는 카메라가 없는 곳에 찾아가는 방식으로 뉴스를 생산한다. 그러나 '디스패치'는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관심사가 되는 것'만을 좇는다. 할리우드 영화 '잭 리처' 홍보행사를 취재 중인 모습. 사진 한겨레 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명박 정부 이후 언론은 공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관심사로 만드는 데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역사에 기록될 실패라고 할 만한 ‘4대강 사업’을 보자. 몇몇 언론이 끈질기게 경고하긴 했지만, 정작 사업을 돌려세울 결정적 뭔가를 언론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원외교가 그러했고, 언론 장악이 그러했으며, 부적절한 인사의 잇따른 기용에 언론은 계속 무력했다. 박근혜 정부의 탄생은 아예 그 무력한 언론, 기울어진 공론장의 조건에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언론의 부진은 지속되고 있고, 아예 총체적인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이 정부의 핵심어라고 할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어떤 언론도 제대로 설명하거나, 조소하거나, 해부하지 않고 있다. 경정 한 명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는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수사 결과 역시 언론의 부진에 기인하는 기만이다. 

신년 기획 열애설 보도의 ‘기획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공적으로 중요한 것들과 ‘관계’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언론이라는 합의안에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디스패치>는 공적으로 중요한 것을 관심사로 만드는 언론 행위가 부진한 바로 이때에 공교롭게도 관심사가 될 만한 것만 공적으로 만드는 활약을 보여주며 떠올랐다. 2013년 1월1일 ‘비와 김태희의 열애설’을 폭로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디스패치>는 이후 ‘원빈과 이나영의 열애설’(2013년 7월), ‘이승기와 소녀시대 윤아의 열애설’(2014년 1월 1일), ’김연아와 김원중의 열애설‘(2014년 3월) 등을 잇달아 낚아채는 ‘쾌거’를 보여줬다. <디스패치>는 유명인의 열애설을 폭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스스로 조율하는 영민한 ‘기획력’도 보인다. 매년 1월1일 ‘신년 기획’ 성격으로 열애설을 터뜨리는 것은 단적인 예다. 올해 역시 ‘이정재와 임세령의 열애를 포착’해 ‘톱스타와 재벌가의 사랑’이란 오래된 흥밋거리에 현재적 호기심을 보태는 데 성공했다. 이정재와 임세령의 열애를 신년 벽두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은 그 사실에 대한 열띤 관심 속에 진부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 책임을 <디스패치>에 물을 수는 없고 분명 별개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디스패치>라고 하는 언론이 꾸려온 시간은 공교롭게도 공적으로 중요한 것과 대중적인 관심사가 해서는 안 되는 경합을 해온 시간과 겹쳐 있다. 공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대중적 관심을 끄는 이슈가 맞춤한 것처럼 득세했다. 한쪽에선 이걸 음모론적으로 바라봤고, 또 다른 쪽에선 그런 음모를 음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정작 그런 충돌은 언제나 대중적으로 관심을 끄는 이슈의 강화로 작동했다. 

<디스패치>는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에 대한 중간 결과 발표가 있던 날, 이병헌의 재판 기록을 ‘단독’이라며 던졌다. <디스패치>의 보도 시점이 조금 빨랐는데, <디스패치>가 ‘창조’해낸 가상의 카카오톡 대화창은 부실한 검찰의 수사 결과를 가리는 가장 확실한 ’우산‘이 돼주었다. ‘로맨틱’ ‘성공적’과 같은 극단적으로 선정적이며 그 맥락과 쓰임을 확인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것들의 유출 앞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향해야 할 시선은 방향을 잃었다. <디스패치>의 보도는 ‘사실’이고, 그날의 풍경은 한국 사회의 ‘진실’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흥미로운 건, <디스패치>는 종종 그런 것마저 활용하고 있단 점이다. 2013년 <디스패치>는 ‘연예 7대 뉴스에 파묻힌 진짜 7대 뉴스’란 제목의 연말 기획을 통해 이런 세태를 스스로 분석하기도 했다. ‘파파라치’ ‘스토커’라는 조롱을 견디며 우리가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최대한 정색하고 설명하려는 듯했던 그 기획은, 그러나 단순한 음모론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 저널리즘의 본질이 무엇을 향해 있는가를 고민하게 했던 중요한 기록이었다. 

  

배우 이병헌씨가 협박 피의자와 주고받은 문자를 공개한 '디스패치'기사는 다시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11월 24일 이씨가 협박 혐의로 구속 기소된 걸그룹 멤버 다희와 모델 이아무개씨에 대한 2차 공판 증인 출석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결코 다르지 않은 황색언론의 전략 

언론이 공적으로 중요한 것을 세상의 주요한 문제로 만드는 데 자꾸 실패할 때마다, 대중은 빠른 속도로 ‘체념’과 ‘냉소’를 터득했다. 한국 사회는 언젠가부터 총체적으로 ‘그러려니’의 정서가 지배하는 사회가 됐다. 이슈는 단발을 넘어서기 힘들고, 사건은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3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더듬어지지 않는데,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이 황폐함과 싸늘함 속에서 한국의 저널리즘은 관심사가 될 만한 것만 진열하는 쇼윈도로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장악된 방송 뉴스가 그 길을 가장 먼저 걸었고, 기사를 전시하는 창구가 사실상 ‘포털’로 일원화된 일간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종합편성채널이 등장하며 언론 전체가 하향화되고, 기사 유통 경로가 모바일로 전환되는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디스패치>는, 말하자면 능동과 수동, 진화와 퇴행, 황색과 연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변화를 어떻게 전유할 수 있는지를 가장 영리하게 보여준 매체다. 그들의 전략은 단순 그 자체다. 저널리즘은 무릇 공적으로 중요한 것을 다뤄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고, 저널리즘이 고민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와 각성을 ‘알 권리’라는 이름의 선정주의와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이는 <디스패치>가 유일한 문제는 아니고 그들이 처음 시도하는 전략도 아니다. 참신해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황색언론(Yellow Paper)이 걸어온 역사적 길이기도 하다. <디스패치>가 취하는 ‘비밀을 폭로하는 것 같은 보도’ ‘짜맞춘 듯한 자극적인 스토리’는 <디스패치>에 앞서 황색언론을 실천했던 매체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오래된 전략이다. 

미디어 연구가 김낙호는 <디스패치>에 대해 “훔쳐보기 보도인데 팩트가 충실하면, 그냥 팩트가 충실한 훔쳐보기 보도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훔쳐보기와 보도는 양립해선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겹쳐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의 존재가 교묘하단 얘기일 것이다. <디스패치>는 이런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오히려 정색하며 ‘저널리즘’을 말한다. 문제적 기사 앞에서 ‘팩트(사실) 중심주의’를 외치는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 섬뜩한데, 어떤 이들은 그걸 자꾸 그럴싸하게 듣는 것 같다. 불길한 일이다. 

  

무엇으로 선정주의를 끊어낼 것인가   

진실(Truth)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대중의 낙담에 언론은 수용자가 더 강력한 걸 원한다는 가설을 세워두고 화끈한 메시지만 꾸역꾸역 전달하는 기계로 스스로를 전락시키고 있다. 이 사이클의 재미는 위험한 만큼 중독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제 점점 왕궁의 저 음탕에 분노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누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인지, 그 주인에게 누가 더 차지고 화끈하게 욕할 것인지를 관전하는 것에 중독돼가고 있다. 이 선정주의 사이클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대안을 잃어가고 있다. ‘모든 언론이 <디스패치> 같았으면 좋겠다, <디스패치>가 귀한 재능을 쓸데없는 데 낭비하고 있다’는 말들이 트위터에서 떠돈다. 이 말들은 <디스패치>에 대한 성찬일까. 정말 언론이어야 하는 집단이 유령이 되고, 유령 같은 집단만 언론처럼 보이는 세상에 대한 저주는 아닐까. 


기사등록 : 2015-01-12 오후 0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