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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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조선 고종
(大韓帝國 朝鮮 高宗)
조선의 제26대 국왕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대한제국의 초대 황실 수장
본명
이형(李)
사망일
1919년 1월 21일 (66세)
황후
명성황후
부친
흥선대원군
모친
여흥부대부인
이전 왕
철종
다음 황제
순종
고종(高宗, 1852년(철종 3년) 음력 7월 25일(양력 9월 8일) ~ 1919년 양력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재위 1863년 ~ 1897년)이자 대한제국의 광무제(光武帝, 재위 1897년 ~ 1907년)이다. 휘는 희(熙) 또는 형(),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1]이다.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과 헌종의 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三從叔)인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 민씨 일족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열강의 개항 요구와 개항하는 즉시 청-일-러 3국의 3파전이 치열한 가운데 국권을 보존해왔으며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양위하였고,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하자 그가 독살당했다는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의 독살설이 기록으로 전한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국새가 발굴되었다.[2]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63년부터 1864년까지 삼종숙모(三從叔母)이자 양어머니인 신정황후 조씨(神貞皇后 趙氏)가 섭정을 하였고 1864년부터 1873년까지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을 하였으며 1873년부터 1907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 2 고종 독살설
- 3 가족 관계
- 4 외국인의 평가
- 5 연호
- 6 대중문화의 고종
- 7 같이 보기
- 8 참고 자료
- 9 주석
- 10 주석
[편집] 생애
[편집] 출생부터 즉위 초기
[편집] 출생과 즉위
아버지 흥선대원군
고종은 헌의대원왕과 순목대원왕비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3]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4]
[편집] 즉위 이전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도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5]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5]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6]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이 당시 고종은 어떤 군밤장수에게 군밤을 구걸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고종은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후 고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자 그 군밤장수를 붙잡아 능지형에 처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는 고종의 시종원 부경[7]을 지낸 바 있는 정환덕이 엮은 '남가몽'이라는 구한말의 비망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편집] 즉위 배경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8] 또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혼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하나는 김병학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김병문의 딸이었다. 이런 밀계로 흥선군은 안동 김씨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를 찾아가 물밑 교섭했다. 조대비의 아들은 헌종이었으나 헌종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강화도령 덕완군 원범이었다. 철종이 헌종보다 윗 항렬이므로 헌종의 양자가 될 수 없었고, 익종에게도 동생뻘이기 때문에 익종의 양자가 될 수도 없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는 이 점을 보고 철종을 간택하여 순조의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히게 도와준다면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계를 맺었다.
1863년 12월 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대비와 조성하, 조영하, 정원용 등은 비밀리에 옥새를 접수한 뒤, 흥선군의 적실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으로 입승대통한다는 교서를 재빨리 발표한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편집] 즉위 초기
고종의 친필 어제사언시 (1864년)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정에서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대원군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9]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들은 열기구를 본따,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편집] 친정과 재위 기간
[편집] 개항과 친정
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음력 9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10]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편집] 청의 간섭과 정변
1884년의 고종.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고종 최초의 사진.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온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편집] 동학 운동과 갑오개혁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11]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4년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용은 1895년 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편집] 을미사변 (명성황후 암살)
- 이 부분의 본문은 을미사변입니다.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12]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12]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암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12] 일본은 1895년 낭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13]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14]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 낭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편집]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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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아래의 역법은 양력(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세자(후에 순종이 됨)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10]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10]
[편집] 대한제국 성립
[편집]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
황제의 격에 맞춰 황룡포를 입은 고종
선글라스를 쓰고있는 고종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원구단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 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8년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를 운행한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10][13]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편집] 이준용의 엄상궁의 귀비, 왕비 책봉 반대운동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 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15]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15]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15]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16]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16]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편집] 러시아, 일본과의 갈등
서양식 제복 차림의 고종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 영친왕의 생모이다.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17]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군대가 해산된다.[10]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대한제국의 황성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10]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편집] 일본의 침략과 강제 퇴위
이처럼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한편 1905년 4월 29일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것을 1906년 2월 2일 법률 1호로 제1차 개정하고, 1908년 7월 23일 법률 19호로 제2차 개정하였다. 이 제2차 개정에서 총 880개조였던 법률 가운데 100개조를 개정, 252개조를 삭제하여 원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결국 1910년 《한국법전》에 형법으로 개명 삽입하였다. 일본 제국은 《형법대전》이 민권 신장의 성과였으므로 도리어 삭제해 버렸다.[10]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18][19]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20]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21]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21]
[편집] 생애 후반
[편집] 일제 강점기 초기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고종 이하 흥친왕, 의친왕, 영친왕, 영선군 등이 일본제국의 왕족 자격으로 황적에 편입되었다. 일부 일본 극우 귀족이 망국의 왕족을 왕족으로 대우해야 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자 일본왕 메이지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왕족가의 딸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1912년 5월 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 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편집] 죽음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그날 한약이나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측 자료(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에 따라 고종의 독살설은 확실시 되고 있다.[출처 필요]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편집] 고종 독살설
- 고종 독살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종은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때도 심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22]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2]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이태왕(李太王·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 여사)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22]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22]고 했다.
[편집] 가족 관계
(왼쪽부터)의친왕, 순종, 영친왕, 덕혜옹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 부 : 문조익황제 효명세자
- 모 : 신정익황후 조씨
- 양숙부 : 철종장황제
- 양숙모 : 철인장황후
- 양형 : 헌종성황제
- 양형수 : 효현성황후 김씨
- 양형수 : 효정성황후 홍씨
- 사친 부 : 헌의대원왕 이하응(獻懿大院王 李昰應)
- 사친 모 : 순목대원비 민씨(純穆大院妃 閔氏)
- 황후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1895년)
- 왕자 (조졸) : 4일만에 사망(1871년)
- 공주 (조졸) : 222일만에 사망(1873년)
- 순종효황제 이척 (純宗孝皇帝 李拓)(1874년~1926년)
- 왕자 (조졸) : 14일만에 사망(1875년)
- 왕자 (조졸) : 105일만에 사망(1878년)
- 후비 :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1854년~1911년)
- 의민태자 은(懿愍太子 垠;1897년~1970년)
- 후궁 : 영보당귀인 이씨(永寶堂貴人 李氏):이순아(李順娥;1843년~1914년[23])
- 완친왕 선(完親王 墡)(1868년~1880년)
- 옹주 (조졸) : 1871년~1872년
- 후궁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의친왕 강 (義親王 堈)(1877년~1955년)
- 후궁 : 상궁 염씨(上宮 廉氏)(1878~1900)
- 서녀 : 이문용(1900년~1987년)
- 후궁 : 광화당귀인 이씨(光華堂貴人 李氏):이완흥(李完興;1887년~1970년)
- 황자 육(皇子 堉)(1914년~1915년)
- 후궁 : 보현당귀인 정씨(寶賢堂貴人 鄭氏)(1882년~1943년)
- 황자 우(皇子 堣)(1915년~1916년)
- 후궁 : 복녕당귀인 양씨(福寧堂貴人 梁氏)(1882년~1929년)
- 덕혜옹주(德惠翁主)(1912년~1989년)
- 후궁 : 내안당귀인 이씨(內安堂貴人 李氏)(1847년~1914년)
- 옹주 (조졸) : 1879년~1880년
- 후궁 : 삼축당상궁 김씨(尚宮 三祝堂尚宮 金氏):김옥기(金玉基;1890년~1972년)
- 후궁 : 정화당상궁 김씨(貞和堂尚宮 金氏)
- 후궁 : 궁인 서씨(宮人 徐氏)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 후궁 : 궁인 장씨(宮人 張氏)
[편집] 외국인의 평가
[편집] 긍정적인 평가
[편집] 외국인들의 개인적인 견해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24]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10]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25]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10]
또한 1895년에 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 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나 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10]
[편집]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26]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26]
[편집] 부정적인 평가
[편집] 정치적 능력
반면에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 의해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10]
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명성황후가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 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27]'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비슷하다.[27]'고 평가했다.
[편집] 암약설
- 고종 암약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해링턴(Harrington)은 한국 최초의 외국인 어의이자 미국 개신교회 선교사였던 앨런(Horace Newton Allen)이 톨레도에서 쓴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를 근거로 삼아 고종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해링턴의 의견은 1903년 10월 14일자 일기 내용은 그저 앨런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었을 뿐, 모든 분야에서 유약하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데에서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앨런이 고종에 대해 쓴 다른 날짜의 일기, 예를 들면 1885년 2월 3일(화요일)(1884년 음력 12월 19일)자 일기에서도 “대단히 진보적인 조치”(This is a very advanced step)라고 하거나, 1886년 양력 9월 11일(토요일)자 일기에서 “국왕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The King is no fool)라고 하였지만 해링턴은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10]
영국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의 주선으로 경복궁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조선의 왕은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하며, 성실하고 유능한 군주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강인한 성격이 있었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28]《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는 현존하는 고종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가운데 가장 자세하면서도 가장 호의적이지만, 비숍의 평가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지만, 일본에서 고종이 암울하고 유약한 군주였다는 소위 “고종 암약설”의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편집] 독립운동 불참과 일본 황적 편입 비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었으나 그는 일본에 적극 저항하지 않았고,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직책과 일본 왕 메이지 천황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했다. 이 점이 국가 지도자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편집]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유학자 황현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수시로 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궁중에서는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29]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이나 매과[30]까지 기승을 부렸다.[29]고 한다.
[편집] 연호
- 이 부분의 본문은 광무 (연호)입니다.
조선 26대 고종 황제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라 정한 뒤 즉위하였다.[31]
광무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1897년
1898년
1899년
1900년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1906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정유(丁酉)
무술(戊戌)
기해(己亥)
경자(庚子)
신축(辛丑)
임인(壬寅)
계묘(癸卯)
갑진(甲辰)
을사(乙巳)
병오(丙午)
광무
11년
[편집] 대중문화의 고종
[편집] 영화
[편집] 드라마
- 정정길 - 1977년 민비 MBC
- 김홍석 - 1982년 (풍운) KBS
- 박칠용 - 1984년 (독립문) KBS 드라마
- 선우재덕 - 1989년~1990년 (바람과 구름과 비) KBS2 드라마
- 김홍석 - 1990년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MBC
- 김세윤 (왕조의 세월) KBS 드라마
- 조재현 - 1995년 (찬란한 여명) KBS 드라마
- 이인 - 2001년 (명성황후) KBS 드라마(아역)
- 이진우 - 2001년 (명성황후) KBS 드라마
- 최종환 - 2010년 (제중원) SBS 드라마
- 송용태 - 2010년 (자유인 이회영) KBS 드라마
- 이형석 - 2012년 (닥터 진) MBC 드라마(아역)
[편집] 무용
[편집] 연극
[편집] 뮤지컬
[편집] 같이 보기
- 대한제국
- 원구단
- 철종
- 익종
- 헌종
- 순조
- 헤이그 밀사 사건
- 조선왕조실록
- 조선 왕 가계도
- 고종 암약설
-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 을사 조약
- 칭제건원
- 명성황후
- 귀인 이씨
- 아관파천
- 민겸호
- 민태호
- 민승호
[편집] 참고 자료
- 《고종실록》 = 《조선왕조실록 고종태황제실록》
- 《일성록》
- 《승정원일기》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개화정책과 그 반향〉
- 《고종시대의 재조명》 = 이태진 (2000년 8월 30일). 《고종시대의 재조명》, 초판 2쇄, 서울: 태학사. ISBN 89-7626-546-7 04910
-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 한계옥 (1998년 4월 10일).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조양욱, 1판 1쇄, 서울: (주)자유포럼. ISBN 89-87811-05-0
-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 한영우 (2001년 10월 20일).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판 1쇄, 서울: 효형출판. ISBN 89-86361-57-4
[편집] 주석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한자로는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다.
- ↑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 ↑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
- ↑ 박영규 (2003년). 《조선의 왕실과 외척》. 박영사, 433쪽쪽. ISBN 89-349-1256-1 03900
- ↑ 가 나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283페이지
- ↑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출판사, 2009) 284페이지
- ↑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관직
- ↑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시공출판사, 2009) 281페이지
- ↑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84~186쪽쪽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5~134쪽.
- ↑ 한계옥, 〈‘국왕 생포 작전’과 왕비 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89~92쪽.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조선 병사의 발포에 의해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도리없이 응전하여 왕궁으로 들어갔다.”이다. 그러나 1994년 나라 여자 대학 교수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가 발견한 일본군 참모 본부편 《淸日戰爭草案》(42권)은 그 모든 과정이 일본 외무성과 군부가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작전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 ↑ 가 나 다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4~35쪽.
- ↑ 가 나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39~63쪽.
- ↑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66~67쪽
- ↑ 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7쪽.
- ↑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쪽.
- ↑ 《일성록》 광무 4년 윤8월 4일; 《승정원일기》 광무 4년 윤8월 4일; 《고종실록》 광무 4년 10월 1일; 《관보》 광무 4년 10월 1일.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 ↑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 ↑ 가 나 다 라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96페이지
- ↑ 1928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 ↑ 《조선왕 독살사건》,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 ↑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8-99쪽. “1886년 5월부터 1890년 2월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겸 외아문 장교사(掌交司) 당상으로 고종을 도운 미국인 데니… (뒤 줄임)”
- ↑ 가 나 이태진, 〈고종 암약설(暗弱說) 비판〉, 《고종시대의 재조명》, 99-102쪽.
- ↑ 가 나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68페이지
- ↑ 《한국과 그 이웃나라》,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살림.
- ↑ 가 나 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35페이지
- ↑ 돈을 주고 과거 합격증을 파는 일
- ↑ 고종황제 즉위식 사진, 연합뉴스, 2009년 8월 20일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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