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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

  • 동학 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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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1]1893년~1895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감국(섭정.[2])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목차

[숨기기]

[편집] 원인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3]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3]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3]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북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편집] 경과

[편집] 제1차 봉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양력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편집] 제2차 봉기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4]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2.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3.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4.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양력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 (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양력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5],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4월 19일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6]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양력 6월 11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특히 김개남은 5~6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들을 살해하여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편집] 제2차 봉기의 성격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7]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8]'는 것이다.

[편집] 제3차 봉기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음력 9월 14일(양력 10월 12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에게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9]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음력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공주 이인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편집] 대원군의 접촉 시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흥선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2]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2][10]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2]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2]

흥선대원군.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1890년부터 1892년 무렵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11]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11]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12]"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까지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 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11] 한편 흥선대원군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 척사파 계열 유학자들도 동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편집] 대원군, 이준용의 음모 탄로

흥선대원군이준용 등은 동학 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13]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11]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13]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3]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13]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12],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12]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14]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12]"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12]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12]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년 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상남도 동래군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편집] 주요 전투

[편집] 황토현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황토현 전투입니다.
[편집] 황룡천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황룡천 전투입니다.
[편집] 전주성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전주성 전투입니다.
[편집] 이인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이인 전투입니다.
[편집] 금구, 태인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금구, 태인 전투입니다.
[편집] 우금치 전투
이 부분의 본문은 우금치 전투입니다.

1894년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서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음력 11월 14일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하였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교자에 포박되어 앉아있는 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 충청,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의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편집]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15]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16]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15]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15]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15]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편집] 관련 인물

[편집]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17]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18]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17]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17]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17]

[편집]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세이토(清藤寺七郞)의 책 《천우협》(千佑俠)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19]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20]'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편집]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21]"라는 것이다.

[편집] 김구
이 부분의 본문은 김구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편집] 윤치소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22]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23]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의 아버지였다.

[편집] 박성빈

동학농민군 고령,성주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편집] 관련 사료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인용] 공초(供草)사료 중에서..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편집] 기타

갑오농민봉기 이후 어처구니 없는 점은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양반 및 부호층들이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농민들을 색출, 학살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농민군이 1차 봉기의 성공 이후에도 양반 및 부호층에 대해 특별한 처형이나 재산 몰수 등이 없이 그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점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후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 부호들과의 연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민족분열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편집] 관련 항목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참고 자료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동학혁명"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 주석

  1. 본 사건의 다른 명칭으로는 '동학 농민혁명'이 있음. 또 본 사건과 동학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1894(갑오) 농민전쟁(또는 혁명이나 운동)' 등이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음. 왕현종, 동학농민전쟁 용어 및 성격 토론: 1894 농민봉기 어떻게 부를 것인가, 1990년 8월, 가을호(통권 12호), 357-364면 참고
  2.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4. 농민군의 강령에 해당
  5. 사정을 하소연함 네이버 한자사전 2011년 6월 22일 확인
  6. 김광재,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2002년 2월, 동학연구 제11집, 99-126면 중 104면
  7. 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
  8. 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
  9. 제1차 봉기 때에는 최시형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 ISBN 89-7474-870-3.
  10. 주한일본공사관기록 8 58~60쪽
  11.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12.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1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
  14. 사람 대중이 하늘을 이긴다.
  1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동학혁명〉
  16.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중앙일보
  17. Daum백과사전 중 전봉준의 출신 및 배경
  18.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
  19.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23~24쪽쪽. ISBN 89-7199-036-8
  20. 한상일, 「동학과 일본 우익:천우협(天佑俠)과의 제휴에 관한 고찰
  21. 유영익, 「갑오농민봉기의 보수적 성격
  22. 동학농민운동 토벌군
  2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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