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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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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모두 괴멸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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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사건의 전개

[편집] 시대적 배경

당시 러시아러시아 내전 중이어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 군대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 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하얀 군대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하얀 군대를 지원하면서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20만 명의 한국 독립군은 적군파에 가담했는데,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 및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붉은 군대가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했다.
이 한인의병대는 일반적으로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인 무력군으로, 이만군대 사령관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 김덕보였고, 다반군대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이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정부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편집] 대한독립군단의 조직
대한독립군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따라서 한국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동 중 일단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다.

  1. 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2. 대한독립단 (이청천)
  3. 대한독립군 (홍범도)
  4. 간도국민회 (구춘선)
  5. 대한신민회 (김성배)
  6. 의군부 (이범윤)
  7. 광복단 (이범윤)
  8. 혈성단 (김국초)
  9. 도독부 (최명록)
  10. 야단 (野團, 김소래)
  11. 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2. 군비단 (軍備團, 김홍일)

대한 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었으며,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일대에서 활동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군정서가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편집] 통수권 갈등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중 이르쿠츠크(노령, 즉 러시아)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는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편집] 사건 이후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볼셰비키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달후 밀산에서 스스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이만으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이사건으로 독립군은 대부분이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들어갔다.

[편집] 사건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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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설명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고 설명하였다.[1]

반면에 다른 교과서[2]에서는,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붉은 군대(소련군)와 하얀 군대(반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하얀 군대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편집] 관련 사건들의 시간순서별 정리

  • 1918년 11월 11일 -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동했지만 붉은 군대와 싸우던 미국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그 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 일본 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군을 철수하기로 결의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 1920년 6월 - 봉오동 전투 발생.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 1920년 10월 21일 -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 대한독립군단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한 권력투쟁이 발생함.
  • 1921년 6월 27일 -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탈출한 사람은 드물고,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었다가 적군에 모두 사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거의 모두 와해됨.

[편집] 참고자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제8장 독립군의 수난과 이동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편집] 주석

  1.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하),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57면, 위 조한나 논문에서 재인용.
  2.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4년 3월 1일).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348쪽쪽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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