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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한겨레 인터뷰.2013.03.08

‘원순씨.’

박원순 서울시장(57)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호칭이다. ‘희망제작소’에 몸담고 있던 시절, 나이와 직함으로 소통이 방해되는 걸 없애자며 자신을 ‘원순씨’로 불러달라고 했다. 실제로 원순씨라고 불러주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를 덜 먹은 젊은 후배들이었다.

원순씨가 처음 서울 구경을 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이다. 시골 아이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던 시절이다. 당시 원순씨가 다니던 경남 창녕군 영산중학교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밀양역에서 완행열차를 탔다. 창 밖 풍경은 어린 원순씨에게 신기하게만 보였다.

서울역 앞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그는 “바깥 구경을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방 안 벽이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했다. 5층 남짓 되는 여관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빵떡모자를 쓴 여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집에서 싸온 삶은 달걀을 던져 빵떡 모자를 맞추는 내기를 했다.

모든 게 신기했다. 호롱불을 켜고 생활하던 원순씨에겐 특히 더 그랬다. 서울에선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신기하게만 보였다. 덕수궁에서 본 세종대왕상은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단골 장소였다. 그 시절 원순씨에게 서울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학생이던 원순씨에겐 ‘서울시장’이란 직함이 따라 붙는다. 그에게 서울은 어떤 의미로 바뀌었을까. 서울은 크다. 연간 시 예산만 20조 원 남짓이고, 공무원 규모도 4만7000명에 이른다. 현안도 많다. 은평 뉴타운 출구 전략에 지하철 9호선 요금 문제, 마을공동체 활성화 사업, 서울시민 복지 기준 추진, 서울시 부채 줄이기 등.

“과로사가 꿈이다”라는 농을 칠 만큼 일벌레인 박 시장과 약속을 잡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인터뷰 시간을 좀더 확보하려면 주말을 이용해야 했다. 지난 2월 16일 오후 4시, 서울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박 시장을 만났다. 직원 대부분이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그는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각종 면담과 방문 일정이 시간대별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나·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이시네요. 잠은 하루 몇 시간이나 주무시는지.

 박원순: 잠이요? 안 자는데….(웃음) 농담이고. 자긴 자는데 좀 부족하죠. 4~5시간쯤 자나봐요. 그래서 낮에 중간중간 좀 졸거나 할 때도 있고요.

 나·들: 직원들이 피곤할 것 같습니다.(웃음)

 박원순: 요즘은 비교적 집에 일찍 들어가는 편입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밤새워 일하고 싶은데…. 미치겠어, 그렇게 못하니까. 이런 마음을 직원들이 알아주려나…. 안 그래도 내가 평소에 지시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집에 들어간다니까요. ‘강제 퇴근’을 당하다 보니 평소 보지 않던 드라마를 많이 보게 돼요. <청담동앨리스>도 즐겨 봤고.

 나·들: 시민운동을 오래하셨잖아요. 그때보다 지금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뭐라고 보시나요.

 박원순: 헤라클레스가 자유를 얻는 대가로 12가지 위험한 모험을 통과해야 했잖아요. 뭔가를 얻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더군요. 시민운동할 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어요. 좋아하는 일 찾아서 할 수 있었고, 틀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죠. 대신 제한된 환경과 여건에서 ‘일당백’의 정신으로 일해야 했지만. 시장이 된 이후에는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말 한마디도 책임을 안고 해야 하는 상황이죠. 대신 이전에는 몇 년을 계획해야 했던 일을 지금은 ‘전광석화’, ‘쾌도난마’로 풀어갈 수 있게 됐다는 장점도 있더군요.

원순씨의 이력서는 한참 길다. 길다는 것은 다채롭다는 걸 뜻한다. 그는 1956년 3월 26일 2남5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살이를 했다. 경복고에 한 번 떨어진 뒤 재수해서 경기고에 들어갔다. 경기고 입시 전 마지막 석 달을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양말을 한 번도 벗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고3 때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된 그는 다시 재수 끝에 서울대에 입학한다. 1975년 5월 유신 철폐를 촉구하며 자결한 김상진 열사 관련 시위에 가담해 4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고, 이 일로 제적당했다. 이듬해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데 이어 1980년 사법시험(22회) 합격, 1982년 대구지검 검사 임용….

1년 만에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아왔다. 인권 변론을 많이 했다. 1995년 ‘참여연대’를 결성하면서 시민운동가로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으로 줄기차게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왔다.

노타이의 편한 차림으로 인터뷰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박승화 기자
 

 나·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우셨나요.

 박원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가장 좋은 거 아닌가요?(웃음) 나는 늘 그래왔던 것 같아요.

 나·들: 어린 시절 꿈이 시인, 정치가였다고 하던데. 원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었나요.

 박원순: 그때는 뭐… 누군가를 보면 ‘아, 난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늘 바뀌기도 했고. 루팡이나 홈스가 나오는 책을 보면 탐정이 되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요즘 아이들이 꿈이 없다고 말하면 참 이상하게 생각되더라고요.

 나·들: 그럼 정치인은 왜 되고 싶었나요.

 박원순: 친척 형님 가운데 예전 공화당에서 일하던 분이 계셨어요. 그 양반이 동네에 오면 발칵 뒤집어지고 그랬어요. 높은 사람 왔다고. 초등학교 2~3학년 때쯤인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자리에 계셨던 것도 아니고 그냥 당료였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건 잠시 생각해본 거고…. 내가 만화에 푹 빠진 때도 있었어요. 만화책을 읽으면서 길을 걷다가 논두렁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웃음)

 나·들: 전기는커녕 촛불도 귀하다고 하셨는데요. 시골에서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가 있나요.

 박원순: 읍내 중학교를 다닐 때는 왕복 30리를 걸어다녔어요. 어릴 때는 그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어요. 뱀이 쫓아와서 빨리 걸어야 할 때 빼고는 좀 지겨울 만큼 길었어요. 그러다 보면 뭔가를 헤아리거나 별의별 걸 다 상상해보는 거예요. 시골에 살다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상상력이 커져요.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라디오는 이발관에 딱 한 대뿐이었어. 집에는 ‘스피커’라고 부르던 것만 있었어요. 스위치를 켜면 ‘김삿갓 방랑기’ 같은 것도 흘러나오고….

경기고 1학년 시절의 박원순 시장.
그동안 원순씨가 한 일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원도 정선에서 등기소장했을 때가 그렇다. 그가 23세 살 때 일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 그는 법원 사무관 시험을 본 적이 있다. 등기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공안직이라고 해서 서기관급 대우를 받았다.

그는 정선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한다. 기차역에 내리자 백발의 할아버지가 큰절을 했다. 사법서사였다. 등기소는 재산 등록을 하는 곳이지만 가끔 등기우편을 부치러 오는 동네 어른들이 많았다. 업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후 2~3시가 되면 그날 업무가 거의 끝날 정도였다. 오후 5시쯤 되면 직원들과 강가에 나가서 고기를 잡곤 하던 추억도 있다. 당시 정선여고 교장 선생님은 술을 마실 때마다 원순씨를 불렀다.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야 자신이 사윗감 후보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이야기를 묻자, 원순씨는 껄껄 웃으며 “등기소장할 때 이야기만으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며 신이 났다.

 나·들: 등기소장을 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면요.

 박원순: 군 차원에서 기관장 회의를 했어요. 그럼 맨 앞에 군수가 앉고, 옆에 경찰서장과 농협장, 안기부에서 나온 조정관 등이 앉아요. 그러고 나면 우리 같은 2급지 기관장들이 참석했어요. 산림청 소속 영림서장과 세무서장, 우체국장, 농산물검사소장, KBS 중계소장 등. 내가 이른바 B급 가운데 가장 어려서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시골 말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논에 모를 심는데 통계를 늘 보고해야 해요. 그런데 20~30%밖에 실적이 안 났는데도 그걸 90% 했다고 보고하는 거예요. 사실대로 보고 하면 그날로 바로 잘린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 통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죠. 통계는 나라의 기본이잖아요. 통계에 기초해서 정책을 세우는 건데 말이에요. 그때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통계의 중요성을 엄청 강조하고 다녔어요. 아무튼 그곳에서 1년 잘 지내고 서울에 와서 고시를 봤어요.

 나·들: 검사 생활도 1년밖에 하지 않았는데요. 그만둘 때 고민은 없으셨나요.

 박원순: 검사를 오래 하려고 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빨리 그만둘 생각도 아니었어요. 가서 보니까 권력이더라고요. 내가 구속할 수도 있고, 기소해서 형량 구형도 할 수 있고. 유치장 감찰을 나가면 경찰서장이 문 앞까지 나와서 절하면서 ‘영감님’이라고 모실 때였어요. 하루는 경산경찰서장이 요즘 현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서 현안이 뭐냐고 물었어요. 당시 야당 정치지도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농성 중이었는데, 이 일 때문에 그 지지자들이 지지 상경을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정국 흐름을 다 꿰고 있다고 생각하니 권력이라는 게 참 우습더라고요. 게다가 그 권력이라는 게 늘 범죄자들과 씨름하는 일이잖아요. 결국 사람 잡아넣는 일인데 영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나·들: 집에서는 반대가 없었나요.

 박원순: 검사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고향에서는 내가 비리가 있어서 그만두는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어요. 다행히 부모님도, 집사람도 말리지 않았아요. 집사람이 반대를 좀 했으면 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웃음)

 나·들: 부인의 배려가 남다르셨던 것 같습니다. 공개 유언장에 보면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고 할 염치도 없다’고 쓰셨는데요.(웃음)

 박원순: 하하하, 그건 내가 기부의 십계명에 대한 책을 낼 때의 일인데요. 젊어서 유언장을 써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거든요. 죽기 전, 병원에 실려갈 때 쓰는 건 너무 늦다고 봐요. 정신이 맑지 않잖아요. 세상과 이별을 하는데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인사 한마디 제대로 안 하고 떠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 얘기를 책에다 썼더니 출판사에서 ‘당신은 왜 안 하느냐’고 하군. 그래서 가족 몰래 밤늦은 시간에 썼죠. 나중에 집사람은 쓸데없는 짓 했다고 말했지만.(웃음)

 

 원순씨의 집무실은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는 대학 교수의 연구실을 떠올리게 했다. 여기저기 책들이 쌓여 있고 서류 파일과 문서 뭉치들로 가득했다. 그가 관여하는 영역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싶었다. 손으로 밀면 무너질 것처럼 기우뚱한 책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창 쪽에는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커다란 채마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토마토와 배추, 치커리 등이 심겨 있다. 반대 쪽에는 강판으로 비스듬히 덧대어 상상나무를 그려놨다. 아이디어 쪽지 등을 자석으로 붙이거나 분필로 메모하도록 한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구두를 벗어놓은 뒤 그 위에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다. / 박승화 기자
 한쪽 벽면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전임 오세훈 시장이 물러난 직후 치른 선거에서 시민들이 그에게 보내준 메시지이다. 아래쪽에는 메시지가 두 그룹으로 구분돼 있었다. ‘참 잘했어요’와 ‘앞으로도 열심히’로. ‘어린이 도서관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부동산특별시가 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공립유치원 확대해주세요’ 따위의 메시지 내용이 후자에 속했다. 시에서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미진한 사업들이다. 포스트잇으로 가득한 벽면은 원순씨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쪽이다. 메시지를 볼 때마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취지라고 한다.

주말이라서 그랬을까. 스트라이프 무늬 셔츠에 노타이의 옷차림이 편안해 보였다. 촬영하고 사진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탁자 밑에선 그만의 ‘조용한 휴식’이 남몰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두를 벗어놓고 그 위로 두 발을 살포시 올려놓은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 대충 구두를 구긴 채 발을 올려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원순씨의 발 매무새는 가지런했다. 틀에 박힌 갑갑함을 싫어하고 평소 꼼꼼해서 정리하기를 즐기는 그의 성격이 겹쳐진 풍경이었다. 흘끗 올려다 본 책상 위에는 오려진 신문 기사 쪼가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들: 신문 스크랩은 직접 하시는 건가요.

 박원순: 서울시 관련 내용은 담당자들이 별도로 스크랩해옵니다. 저것은 서울시와 관계없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기사예요. 시장이 아니라 개인 박원순이 모아두는 것이죠. 오리는 건 직원들이 도와주고 정리는 내가 해요. 물론 시장이 되기 전에는 직접 가위로 오려서 스크랩했죠. 워낙 오래된 습관이라서.(웃음) 비서들은 내 방에서 펀치 소리가 나면 시장님 스트레스 해소한다고 좋아해요. 삼단 펀치로 구멍을 뚫어서 파일에 잘 정리해두면 머릿속에도 그 내용이 잘 정리되는 것 같고, 일종의 힐링이랄까요.

 나·들: 메모도 늘 열심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던데요.

 박원순: 나는 누구나 만나면 수첩에 뭔가를 적어요. (수첩을 직접 보여주면서) 아까 여기 오신 분하고 만날 때도 메모를 한 바닥이나 했네요. 그분은 ‘시장(市場)을 만드는 시장이 되라’고 하더군요. 일명 ‘마켓 크리에이터’. 그런 아이디어를 들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식이죠, 남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다기보다는.

 나·들: 평소 ‘아무것도 안 한 시장’으로 남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어떤 시장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박원순: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잘 하도록 내버려두면 될 것 같아요. 좀 힘든 사람들은 우리가 부축해서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어느 한 분야의 일이 시정 업무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봐요. 1천만 서울 시민들의 삶이 무척 다양하잖아요. 임기 안에 뭔가를 완성해서 보여주기보다는 서울시가 잘 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최고의 행정 아니겠어요? 생태계가 구축돼 있지 않으면 정책이 철수되고, 예산이 끊어지는 순간 끝나버리게 돼요. 시민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공무원에게도 늘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직접 가서 다 하지 말고, 늘 뒤에서 지켜보고 필요한 거 지원하고 빠지라고 해요. 하나의 인프라가 구축이 될 수 있도록.

박 시장이 지난해 10월 취임 직후 한 첫 결재는 ‘무상급식’이었다. 무상급식은 보궐선거로 원순씨를 시장님으로 만든 단초를 제공한 바로 그 정책이었다. 시는 그 대상을 단계적으로 늘려 내년까지는 중학생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그가 이끄는 시 행정의 열쇳말은 ‘삶의 질’이다.

‘아무것도 안 한 시장으로 남겠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우선 대규모 토목공사를 중점 과제로 삼던 관행이 사라졌다. 때만 되면 하던 보도 블럭 교체 공사도 거의 없어졌다. 대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정책이 곳곳에서 스며들고 있다. 무상급식뿐 아니라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시행이나 산하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공립 보육시설 확충, 간병료를 절약할 수 있는 환자안심병원 개원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시장 박원순 / 박승화 기자

 

나·들: 지난해 말, 집 없이 여관에서 사는 부녀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잖아요. 그때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박원순: 그러니까 그게… 지난겨울에 복지시설을 돌면서 ‘서울에 굶는 사람 없고, 냉방에서 자는 사람 없게 하자’고 강조할 때였어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좀 살펴보라고 직원에게 말하고 사실 난 잊고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복지건강실에서 학교와 찜질방, 여관 등에다가 공문을 보냈더라고요. 그런 데서 어렵게 지내는 가구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내가 그 직원을 불러서 무척 고맙다고 했어요. 그래서 긴급 지원이 필요한 42가구를 발굴했어요.

 나·들: 그들을 직접 보니 어떤가요.

 박원순: 내가 간 곳은 여중생이 아빠랑 여관방에서 지내는 경우였어요. 그래도 아이가 참 밝은 편이었어요. 기죽지도 않고. 가장 창피한 일이 여관에서 나와 학교 갈 때라고 하더라고요. 충분히 이해가 되잖아요. 우리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몰라서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책상머리 앞에서 하는 거 정말 싫어해요. 그래서 실국장들에게도 가끔 물어봐요. (어떤 정책을 보고하면) 이거 직접 가보신 것이냐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간부들이 당황할 때가 많죠.

 나·들: 최근 몇 년 동안 복지 논쟁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져 왔잖아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 가운데서도 이행 여부와 관련한 가장 큰 논란이 복지 영역에서 나오고 있고요. 이런 논란에는 재정 부담 문제가 단골로 나오는데, 시장이 생각하는 해법은 뭔가요.

 박원순: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요. 그러면 도대체 돈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느냐고. 사람한테 써야 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아까 그 여학생이 계속 여관에서 상처를 안고 자라나게 한다면 그건 나중에 결국 우리 사회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최소한의 교육과 삶의 질을 보장해주면 나중에 우리 사회에 더 큰 이바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잖아요.

 나·들: 올해 복지 분야에 6조 원의 예산을 쓰겠다고 했는데, 우선인 복지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박원순: 가장 힘든 사람이겠죠.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가장 힘든 순서로 복지정책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서울시가 ‘시민 복지기준’이라는 걸 만든 거고요. 소득, 주거, 돌봄, 교육, 의료 등 5개 분야에 걸쳐 시민들이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규정을 마련했어요. 이미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바 있어요. 인간이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 수준이라고 할까요.

 나·들: ‘부채 줄이기’라는 큰 과제도 안고 있는데, 복지 예산에 대한 압박은 없는지요.

 박원순: 부채는 일단 더 이상 안 늘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세가 확 늘어나고 있다가 지금 멈춘 상태고… 오히려 1조1천억 원 정도 줄이기까지 했어요. 개인 살림이라면 사실 제가 확 굶으면서 하겠지만 시의 살림은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아무튼 복지정책을 늘려가면서도 부채를 줄이고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나·들: 당장 공공 임대주택 8만 호 공급과 부채 7조 원 줄이기 공약이 상충된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박원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게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죠. 그런데 둘다 우선 순위를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시의 시급한 현안이라는 점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단 한푼이라도 아끼자는 생각으로 나부터 판공비를 자진해서 17% 줄였고, 그마저 절반을 남겼습니다.(웃음) 또 하나는 임대주택 공급 방식에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건설’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새로 적용해가고 있어요.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1인용 초소형 주택이나 시립 의료시설과 연계한 의료 소외계층 돌봄형 주택, 협동조합형 임대주택…. 창의적 발상을 통해서 비용은 줄이고, 물량과 배려는 늘려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나·들: 함께 어울려 사는 삶으로 마을공동체 사업이나 공유도시 등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신 건가요.

 박원순: 사람은 모든 게 경험의 소산이거든요. 어릴 때 시골 동네에 한 100가구 정도 모여 살았는데, 어렵게 살면서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었어요. 누가 무슨 일이 있으면 다 가서 돕고 음식도 나눠 먹고 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던 거죠. 이게 근대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지면서 흉악한 범죄도 많이 생겨나고 한 건데요. 사회적 경비로 계산하면 엄청난 낭비죠. 나는 서울이 10여 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질을 높이면 사람들이 창조적으로 바뀌게 돼요. 훨씬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데 유리하게 되고요. 영국 런던 같은 경우 창조 산업 비중이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0%나 됩니다. 우리는 통계에도 잘 안 잡힐 만큼 아직 미미한 수준이죠. 가야 할 길은 뻔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들: 현안이 아주 많잖아요. 가장 스트레스 받는 일은 어떤 건가요.

 박원순: 나는 내가 굉장히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미셀러니’(Miscellany)라는 말이 있어요. 사소한 일을 소재로 가볍게 쓴 수필을 뜻하는 건데요. 나 스스로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 소장’이라고 했는데, 그런 연구소가 실제로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모든 문제 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웃음) 나는 일이 잘되면 재미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잘되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하면 되지 왜 구태여 내가 해야 하나 싶었고. 지하철 9호선 요금 인상 문제 같은 건 굉장히 어렵죠. 잘 아시는 것처럼 맥쿼리라는 기업으로 세금이 들어가는 계약 구조인데 시민 이익을 위해서 바꿔야 하는 게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좀 혹독한 고난을 헤쳐나오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시장 선거 나오기 직전 백두대간 종주할 때도 발톱이 빠질 만큼 힘들었는데 기억에는 남죠.

 나·들: 그런 걸 왜 즐기시는 거죠.

 박원순: (웃음) 흐릿한 거는 재미 없어서….

 

 원순씨는 ‘서울시를 신나는 직장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한다.

 “서울시가 덩치가 크잖아요. 어마어마한 항공모함을 운영해가는데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 신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겠어요. 취임하고 나서 직원들과 인사를 건네는데 어째 표정이 좀 그렇더라고요. 어두웠어요. 막 손 흔들면서 ‘시장니~임’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계약직 공무원이거나 시민뿐이었어요.”

관료 조직도 신 나는 직장으로 바꾸려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배려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인사 과정에서 직원에 대한 배려를 늘렸다. 희망 부서를 다섯 군데까지 적어 내게 하고, 필요하면 인사과를 통해 상담도 해주도록 했다. 승진심사 때도 직원 대표의 참여를 늘리는 등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고용이 불안정했던 청소직 여성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도 박 시장의 손길이 미친 결과였다.

“불합리한 것은 뜯어 고치려는 편이에요. 브라질 이과수 폭포 아시죠? 그곳이 늘 외유 시비가 붙는 ‘공무원의 무덤’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출장 가더라도 그곳에는 아무도 안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련 규정을 바꿔버렸어요. 해당 지역으로 공무상 출장을 가면 일 끝나고 개인 휴가를 붙여서 보고 올 수 있도록. 거기까지 가서 안 보고 오는 게 바보잖아요. 관광 위주로 출장을 잡는 것은 문제지만.”

시민에 대해선 ‘큰 귀로 잘 듣는 시장’이 되는 게 중요한 목표다. ‘홍보하는 서울시’가 되기보다는 ‘소통하는 서울시’가 되겠다는 뜻이다. 이를 일명 ‘서울시 스타일’로 구축해내겠다는 것이 박 시장의 생각이다. 현안 이슈와 관련해 이해 당사자와 시민, 공무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청책회’를 연거나, 세빛둥둥섬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7대 사업에 대해 자칫 예민할 수 있는 각종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 일 등이 대표적이다.

트위터 팔로어가 66만 명에 이르는 등 원순씨의 왕성한 소셜미디어서비스(SNS) 활동도 소통을 보완한다. 매일 밤 트위터에선 ‘시장님, 하트(♥)를 날려주세요’라는 시민의 요청이 쇄도한다. “또 하나의 소통 창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버스 회사의 임금 체불 문제가 해결됐고요. 버스정류장 표지판에 진행 방향 화살표 표시를 하자는 청년의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채택되기도 했어요. 내가 직접 하지 않는 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내가 하는 거 맞습니다.(웃음)”

나·들: 내년 6월로 임기가 끝나잖아요. 재출마하실 거죠.

 박원순: 한 번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요. 임기가 3년도 채 안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시민이 선택할 일이죠. 서울시장은 행정가인데,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을 뽑는 선거는 정치의 영역이더군요.

 나·들: 박근혜 당선인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해드리고 싶은가요.

 박원순: 지난 1월 31일 전국시도지사협의회 때 얼굴만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2분씩만 이야기하게 돼 있어서 할 말을 충분히 하지 못했어요.(웃음) 나는 대통령에게 ‘소통’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현실에 맞는 정책을 펴려면 검증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 검증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대통령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전문가, 시민 등을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도 이런 걸 하느라 피곤하고 많이 힘들어요. 그동안 공무원은 ‘갑’의 입장이었는데 ‘을’의 입장으로 바꿔야 하거든요. 그리고 서울시를 1년6개월 동안 운영하면서 여러 시행 착오를 겪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도시를 운영해본 경험자로서 해줄 말이 많지 않겠어요?

 나·들: 만남을 요청한 적이 있나요.

 박원순: 여러 번 요청했는데 아직 좀 기다려야 하나 보더라고요.

 나·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서울시가 진보 진영의 외로운 기지가 됐는데요. 시장이 소속된 민주통합당이 그리 썩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 만큼 차기 대권주자를 놓고 시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박원순: 이미 저는 시장 선거를 거치면서 버린 몸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라고 하는 흙탕물에….(웃음)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왔어요. 시민운동가로 인생을 마치겠다고. 거기는 아무도 안 오려고 하니까 훨씬 더 빛나는 일이잖아요.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나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자리 같은 게 대통령보다 못한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난 선거에서 여러 사정을 거쳐 뿌리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시장이 됐단 말이에요. 그 이후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내가 되고 싶다고 한들 될 리도 없고, 안 하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어떤 운명의 힘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들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들: 말씀을 듣다 보니 더 궁금해지는 데요.

 박원순: 그동안 나는 미래의 일에 대해 한번도 걱정해본 적이 없어요. 현재를 살다 보면 미래는 저절로 생기는 거거든요. 참여연대에서 아름다운가게로, 다시 희망제작소로 옮길 때도 그랬어요.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데로 가는 거죠. 희망제작소 만들고 나서 한 5년 정도 하고 나니까 내가 외국에 나가 있으면 전화도 잘 안 오더라고요. 그러면 ‘아, 내가 떠날 때가 됐구나’ 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적 기업의 물건을 팔아주는 유통회사를 한번 기가 막히게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어요. 그래서 서울시장 선거에 나오게 된 거고요. 백두대간 종주할 때 소백산의 한 성황당에서 훔쳐 먹은 떡 때문에 산신령이 분노한 게 아닌가 몰라요.(웃음)

 

 마지막으로 원순씨가 살아오면서 만난 인생의 멘토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평소 “세 명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한 명은 스승이라는 공자님의 말이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내 멘토이자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왔다. 혹여 틀린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서 배울 점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네 사람이 있다. 장가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인 박실경 선생님과 강송식 전 경기고 영어 선생님(현 한우물정수기 대표)을 먼저 꼽는다. “박 선생님은, 개구쟁이 시절 공부에 전혀 관심 없을 때인데 내가 뭘 하나 맞혔더니 하루 종일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그날 이후로 진짜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어요. 칭찬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고. 대학입시밖에 모르던 시절, 강 선생님은 월급을 쪼개 가난한 아이들의 등록금도 내주시곤 했는데, 공부만 잘해선 안 된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내가 시민단체 할 때도 사업으로 돈을 버시면 연락해서 많이 도와주셨고요.”

다음으로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고 한창기 선생이다. 고문변호사를 맡으면서 인연을 맺은 박 시장은 꼼꼼한 성격은 한 선생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기사 교정 한번 잘못 보면 총살한다는 말을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농담이겠지만, 듣는 직원은 어땠겠어요. 아마 지금 우리 서울시 공무원들 힘든 거랑 비슷할 거예요.(웃음)”

고 조영래 변호사에게는 세상을 볼 줄 아는 통찰력과 포용력을 배웠다고 한다. 박 시장은 “조영래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이 다르다”고 믿는다. 법률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사회적 어젠다로 만들어내는 능력, 그 과정에서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어떤 일에 몰입하는 자세도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이 네 사람과의 인연이 큰 ‘자랑’이자 ‘행운’이라는 원순씨의 눈동자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