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씨.’
박원순 서울시장(57)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호칭이다. ‘희망제작소’에 몸담고 있던 시절, 나이와 직함으로 소통이 방해되는 걸 없애자며 자신을 ‘원순씨’로 불러달라고 했다. 실제로 원순씨라고 불러주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를 덜 먹은 젊은 후배들이었다.원순씨가 처음 서울 구경을 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이다. 시골 아이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던 시절이다. 당시 원순씨가 다니던 경남 창녕군 영산중학교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밀양역에서 완행열차를 탔다. 창 밖 풍경은 어린 원순씨에게 신기하게만 보였다.서울역 앞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그는 “바깥 구경을 하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방 안 벽이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했다. 5층 남짓 되는 여관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빵떡모자를 쓴 여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집에서 싸온 삶은 달걀을 던져 빵떡 모자를 맞추는 내기를 했다.모든 게 신기했다. 호롱불을 켜고 생활하던 원순씨에겐 특히 더 그랬다. 서울에선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신기하게만 보였다. 덕수궁에서 본 세종대왕상은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단골 장소였다. 그 시절 원순씨에게 서울은 동경의 대상이었다.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학생이던 원순씨에겐 ‘서울시장’이란 직함이 따라 붙는다. 그에게 서울은 어떤 의미로 바뀌었을까. 서울은 크다. 연간 시 예산만 20조 원 남짓이고, 공무원 규모도 4만7000명에 이른다. 현안도 많다. 은평 뉴타운 출구 전략에 지하철 9호선 요금 문제, 마을공동체 활성화 사업, 서울시민 복지 기준 추진, 서울시 부채 줄이기 등.“과로사가 꿈이다”라는 농을 칠 만큼 일벌레인 박 시장과 약속을 잡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인터뷰 시간을 좀더 확보하려면 주말을 이용해야 했다. 지난 2월 16일 오후 4시, 서울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박 시장을 만났다. 직원 대부분이 쉬는 토요일이었지만 그는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각종 면담과 방문 일정이 시간대별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나·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이시네요. 잠은 하루 몇 시간이나 주무시는지. 박원순: 잠이요? 안 자는데….(웃음) 농담이고. 자긴 자는데 좀 부족하죠. 4~5시간쯤 자나봐요. 그래서 낮에 중간중간 좀 졸거나 할 때도 있고요. 나·들: 직원들이 피곤할 것 같습니다.(웃음) 박원순: 요즘은 비교적 집에 일찍 들어가는 편입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밤새워 일하고 싶은데…. 미치겠어, 그렇게 못하니까. 이런 마음을 직원들이 알아주려나…. 안 그래도 내가 평소에 지시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집에 들어간다니까요. ‘강제 퇴근’을 당하다 보니 평소 보지 않던 드라마를 많이 보게 돼요. <청담동앨리스>도 즐겨 봤고. 나·들: 시민운동을 오래하셨잖아요. 그때보다 지금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뭐라고 보시나요. 박원순: 헤라클레스가 자유를 얻는 대가로 12가지 위험한 모험을 통과해야 했잖아요. 뭔가를 얻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더군요. 시민운동할 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어요. 좋아하는 일 찾아서 할 수 있었고, 틀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죠. 대신 제한된 환경과 여건에서 ‘일당백’의 정신으로 일해야 했지만. 시장이 된 이후에는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말 한마디도 책임을 안고 해야 하는 상황이죠. 대신 이전에는 몇 년을 계획해야 했던 일을 지금은 ‘전광석화’, ‘쾌도난마’로 풀어갈 수 있게 됐다는 장점도 있더군요.원순씨의 이력서는 한참 길다. 길다는 것은 다채롭다는 걸 뜻한다. 그는 1956년 3월 26일 2남5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살이를 했다. 경복고에 한 번 떨어진 뒤 재수해서 경기고에 들어갔다. 경기고 입시 전 마지막 석 달을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양말을 한 번도 벗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고3 때 결핵성 늑막염을 앓게 된 그는 다시 재수 끝에 서울대에 입학한다. 1975년 5월 유신 철폐를 촉구하며 자결한 김상진 열사 관련 시위에 가담해 4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고, 이 일로 제적당했다. 이듬해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데 이어 1980년 사법시험(22회) 합격, 1982년 대구지검 검사 임용….1년 만에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아왔다. 인권 변론을 많이 했다. 1995년 ‘참여연대’를 결성하면서 시민운동가로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으로 줄기차게 시민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왔다.노타이의 편한 차림으로 인터뷰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박승화 기자 |
경기고 1학년 시절의 박원순 시장. |
박원순 시장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구두를 벗어놓은 뒤 그 위에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다. / 박승화 기자 |
서울시장 박원순 / 박승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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