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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돌아가는 이야기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사용중인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 내부 모습.(왼쪽) 현재 경찰 보안수사대가 사용하고 있는 서울 시내 각 보안분실의 모습. 백재현 의원실 제공

[뉴스쏙] ‘옛 대공분실’인 보안분실 전국 25곳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 1985>의 예고편이 18일 공개돼 누리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부터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사용중이다. 노무현 정부가 군사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취한 조처였다. 그러나 대공분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름을 ‘보안분실’로 바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이 ‘어둠의 공간’을 해부해본다.

현 정부 들어 인력 대폭 증가
검거자만 많고 구속률은 낮아
“보안법 적용 남발” 실효성 의문

■ 하얀 방의 악몽 최순택(가명·34)씨는 ‘하얀 방’을 기억한다. 지난해 3월 최씨는 대학생 연구동아리 ‘자본주의연구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서른 넘어서도 대학에 다니던 최씨는 대구 집에서 경찰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보안분실로 끌려갔다. 5평 남짓한 하얀 방에 끌려온 최씨는 영장 없이 붙잡아둘 수 있는 법적 한도인 48시간을 꽉 채워 조사를 받았다.

하얀 방에서 최씨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열 꾸러미의 수사자료였다. 김씨가 누군가와 만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동아리 세미나 자료, 통신기록 등이 빼곡했다. 평범한 경찰서가 아닌 보안분실이었기에 최씨의 놀라움은 더 컸다.

“보안분실은 사람을 경직되게 해요. 과거에 고문이 일어났던 곳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위압감이 있거든요. 건물이 은폐돼 있으니까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도와줄 수 없겠구나’ 하는 고립감을 느끼게 하죠.” 최씨가 말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김철수(가명·48)씨도 ‘하얀 방’의 스산함을 기억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역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차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나중에야 그곳이 동대문구 장안동 보안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방이 흰 벽으로 꽉 막힌 방이었어요. 안에는 숙식이 가능한 시설도 있었어요. 빛은 안 들어오고 공기만 겨우 통하게 만든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사실상 창문이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김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제가 직접 강압적 수사를 받진 않았지만, 예전에 보안분실에서 고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 등줄기가 오싹해지더라고요.” 경찰이 강압하지 않아도 지레 겁부터 먹은 것이다.

■ 이웃 주민들도 모르는 건물 지난 15일 <한겨레>는 서울 양천구 신정동 보안분실을 직접 찾았다.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알아낸 주소지에는 5m 높이의 담장 너머로 2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다. 대문과 담벼락 어디에도 간판이나 경찰 표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사복 차림의 사내가 대문으로 걸어나왔다.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힌 사내는 “보안구역”이라며 기자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국 모든 경찰서가 기자는 물론 민원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용하는 것과는 딴판이었다.

지난 17일 백재현 민주통합당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이 공개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보안분실에도 직접 가봤다. 5196평 넓이의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이 서 있었다. 지하에는 목욕탕과 기계실이 있고, 1·2층엔 직원들의 사무실, 3층에는 12개의 조사실과 변호인 접견실이 마련돼 있었다.

1인용 조사실은 4~5평 규모이고, 여러 명을 함께 조사할 수 있는 10평 남짓한 조사실도 갖추고 있었다. 조사실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두 대씩 달려 있었다. 한 대가 고장날 경우를 대비해서다. 3층 계단 옆 첫번째 방에는 12개 조사실의 상황을 폐회로텔레비전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상황실이 마련돼 있다.

외부를 붉은 벽돌로 둘러싸고 복도를 온통 흰색 페인트로 칠한 홍제동 보안분실에서는 모두 65명의 보안수사대 경찰관이 근무한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지만,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주민은 드물었다. “이 건물이 무슨 건물이냐”고 묻는 기자의 물음에 인근 주민들은 “무서운 곳”, “안기부”, “정보부”라고 제각각 답했다.

경찰서 아닌 비밀공간서 수사 
부산·대전청은 보안분실 없애
“일 생기면 밖에서 알 수 없겠구나”

■ 전국 보안분실 25곳…실속은 없어 경찰청이 백재현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현재 경찰은 전국 25곳에 보안분실을 따로 마련해 운영중이다. 서울에만 5곳의 보안분실이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경찰은 보안수사대 인력을 계속 늘려왔다. 2008년 어청수 경찰청장 시절 337명이던 보안수사대 근무인원은 강희락·조현오 청장을 거쳐 김기용 청장이 재임중인 2012년 7월 현재 484명에 이른다. 수사인력이 늘면서 보안 관련 사건도 늘었다. 2008년 40명이던 검거 인원은 지난해 135명으로 3배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구속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경찰청이 임수경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08년 27.5%였던 국가보안법 위반 검거자 대비 구속률은 2011년 12.6%까지 떨어졌다. 최근 5년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붙잡힌 사람들 가운데 구속된 경우는 평균 17.8%에 불과하다. 2011년을 기준으로 경찰 인력 대비 구속건수로 따지면, 보안수사대 경찰관 30명이 1년 내내 겨우 1명을 구속시킨 셈이다. 수사 단계에서 부풀려졌다가 기소 단계에서는 간첩 예비·음모 혐의만을 적용한 이른바 ‘지피에스(GPS·위치정보시스템) 간첩 사건’처럼 무리한 수사도 여전하다.

구속영장 기각률을 봐도 마찬가지다. 2010년 경찰청 국정감사 때 공개된 자료를 보면, 2008~2010년 경찰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구속영장 기각률은 40%가 넘는다. 이는 다른 사건을 모두 포함한 경찰의 평균 구속영장 기각률 20%보다 2배가 높은 수치다. 임수경 의원은 “경찰이 무리하게 국가보안법 적용을 남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경찰청 보안국 관계자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인 요즘의 상황도 있고, 보안수사 특성상 검거율이나 구속률로 실적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 보안분실을 시민에게 돌려주자 인권단체들은 보안분실을 폐지 또는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처럼 고문을 자행할 게 아니라면 굳이 외부의 출입이 차단된 보안분실에서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보안사건만 전담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인권침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안 수사의 장소는 오히려 외부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바꿔야 한다”며 “기왕의 보안분실은 지역 도서관 등으로 개조해 시민들에게 되돌릴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이광철 변호사는 “보안분실 운영에 법적인 문제는 없다지만시민들에게 경찰이 비밀스러운 조직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자칫 공포감을 일으킬 수 있는 시설물에 대해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보안분실 운영에 의문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 간부는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경찰이 공개된 경찰서가 아닌 폐쇄된 공간에서 수사를 할 이유는 없다”며 “불필요한 공간에 과도한 인원이 배치돼 무리하게 입건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부산지방경찰청과 대전지방경찰청은 별도의 보안분실 없이 청사 안에서 보안수사대를 운영중이다.

이에 대해 경찰청 보안국 관계자는 “전문성과 장기간 수사가 요구되는 보안사건 수사의 경우 탈북자 관리를 우선으로 하는 일반 경찰서 보안과에서 담당하기 어렵다”며 “수사를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외부 눈길이 많은 경찰서보다 보안분실에서 수사받는 것이 인권침해 우려가 적다”고 말했다. 보안분실 건물에 간판 등을 달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위치가 노출될 경우 보안상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지훈 이정국 박아름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