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5대 범종이라고 하면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천흥사동종, 그리고 개성 남대문의 연복사종, 서울 종로의 보신각종, 오대산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을 꼽는다. 이 가운데서도 상원사동종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종소리는 물론, 청동 합금 및 주조기술 면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기능적.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곡선미와 다양한 문양 등에서도 한국종의 모범이 되고 있다. 특히 당좌의 위치가 절묘하게 설계되어 있고, 만파식적을 상징하는 음관이 달려있는 등 한국종의 독창적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설명 : 상원사 동종 전체 모습.>
상원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산록에 있다. 신라시대에는 번영을 구가했으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 세조 때 중창되면서 사세가 확장되고 위상이 높아졌다. 그 후 예종 대에 와서 세조의 뜻을 따라 1469년(예종 1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숭유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시대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번창했던 상원사는 불행히도 1946년 선원 뒤에 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다.
근래에 복원된 상원사에는 문수동자상을 봉안한 문수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종각, 승당 등이 있으며, 문수전 앞마당 오른 쪽에 있는 작은 건물 안에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종이 달려 있다. 지금은 종의 마멸과 훼손을 막기 위해 타종을 그만 두고 있어 긴 여운과 웅장한 종성을 실감해 볼 수 없으나 참신한 의장(意匠)과 우아한 문양은 아직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현재의 상원사 동종이 상원사에 걸리게 된 것은 지금부터 540여 년 전, 즉 조선 예종 1년 1469년의 일이다. 종의 유래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가지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데, 먼저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윤2월조를 보면, 다른 사안을 기록한 내용 중에 상원사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잠깐 언급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예종 당시 학열 등 스님들이 선례가 있음을 빙자하여 역마(驛馬)를 빌려 타고 다니는 사례가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절에 머물 때 그냥 두기도 하는가 하면, 역리로 하여금 지나는 역에서 먹여 기르게 하기도 하고, 더러는 7, 8일에 이르러 사람과 말이 피곤하고 역로(驛路)가 원활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할 목적으로 역리(驛吏)는 길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비록 스님일지라도 역마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청을 왕에게 올렸다. 이에 왕이 환관을 낙산사에 보내어 학열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학열스님이 글로 아뢰기를, “신이 내려올 때에 낙산사 감역승(監役僧) 양수.의심.숭덕스님 등이 신과 함께 포마를 타고 상원사에 이르러 수륙재를 베풀었고, 뒤에 낙산사에 이르러 신이 숭덕스님 등으로 하여금 안동 관(官)의 종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숭덕스님 등이 원주 신림역을 떠나 제천을 경유하여 바로 안동에 도달하였으니, 이는 길을 잘못 간 것이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사진설명 :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내용 중에 ‘안동 관(官)의 종’을 운반했다는 대목이 주목되는데, 경북 안동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6권에도 안동 누문의 옛 종을 상원사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숭덕스님 등이 운반해 갔던 종이 바로 지금 상원사 종각에 걸린 종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종을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가기 위해 죽령을 넘을 때 종이 너무 무거워 어려움을 겪자 종유(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돌려보내니 쉽게 움직였다고 한다.
상원사 동종의 제작 연대는 종명(鐘銘)에서 밝혀진다. 종명은 종의 용뉴 좌우에 음각되어 있는데, 우측 명문에 새겨진 ‘개원(開元) 13년’은 신라 성덕왕 25년(725년)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대부분의 종명이 종신(鍾身)에 새겨지는 것과 달리 상원사 종에서는 종의 정수리의 용두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례적인 것은 이 종의 종명에는 시주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로 민간의 시주로 만들어지는 일반 종의 경우와 달리 특수한 사연으로(국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사진설명 : 종뉴. 대부분의 종명이 종신에 새겨져 있는 것과 달리 용두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명문을 내용을 보면 “개원 13년 을축 3월8일에 종이 완성되어서 이를 기록한다(開元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鐘成記之)”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해서, 종을 제조하는 데 들어간 놋쇠가 모두 3300 정(鋌)이었음을 밝히고,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범종은 절에서 불음을 전하는 중요한 음향 예기로 사용되어왔다. 범종은 번민을 버리지 못한 사바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조석 예불 시에 타종해 온 것으로서, 제2의 부처님처럼 신성시 되었다. 상원사 종 역시 이런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원사 동종은 웅장하고 맑은 종소리와 아름다운 의장에 있어 현재 국내에서 최상으로 손꼽힌다. 앞서 말한 〈영가지〉에서도, “종의 성음이 웅장하고 맑아 백리 원문(遠聞)의 이름난 종”이라 했고, 또 미관에 대해서는, “종신이 단정.장중하고 조각 솜씨가 우미.아담함에 있어 유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앞뒤에 새겨진 정교하고 환상적인 비천상
천지를 울리게 할 것 같이 크게 벌린 입…
몸체에 비해 현저하게 큰 ‘용두’ 눈길 끌어
상원사 동종을 볼 때 제일먼저 용뉴를 구성하고 있는 위엄 있는 용두에 감탄한다. 용두는 몸체에 비해 현저하게 크고 타종에 놀란 듯 한 큰 눈, 오뚝 솟은 귀와 날카로운 뿔, 천지를 명동(鳴動)케 할 것처럼 크게 벌린 입, 하늘을 나는 듯 한 억세고 힘찬 발과 다리, 이 모든 것이 이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두의 약동하는 모습이다.
<사진설명 : 종명 탁본(부분).>
용뉴 옆에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관이 연꽃과 덩굴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음관은 용뉴의 강도를 증가시키고, 또한 타종 시에 종 내부의 공기 진동을 완화시켜 파장을 길게 함으로써 종소리가 멀리까지 전파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고, 만파식적을 상징화한 것으로 믿어지기도 한다. 음관 표면에 시문된 우아하고 정교한 보상화문과 연화문은 신라시대의 수준 높은 금속 공예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종신에는 당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신라시대 종의 당좌 위치에 대한 일정한 법칙은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통하여 그 위치를 정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좌에는 고래로부터 연화문양이 많이 쓰였는데, 상원사종의 당좌 경우도 연화문양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상원사 동종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종의 배 앞뒤에 새겨진 정교하고 환상적인 비천상일 것이다. 비천은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천의 자락이 상승 기류를 타고 위쪽으로 가볍고도 유려하게 휘날리는 모습은 실로 환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비천을 떠 올리고 있는 영지버섯 모양의 구름은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있으며, 천의의 띠 끝부분의 인동(忍冬) 문양은 비천의 장식 효과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비천이 연주하는 수공후 등의 악기는 우리 고유의 악기가 아니라 서역 계통의 악기이다. 이런 악기의 등장은 비천상의 표현 형식이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원사종의 비천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다. 그런데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 공양의 상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상원사종의 비천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양자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천상은 종신(鐘身)뿐만 아니라 종의 위쪽의 띠 안 반달형 권역 속에도 새겨져 있다. 피리와 쟁(箏)을 연주하고 있는 작은 비천상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아래쪽 띠에도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 취악기, 피리, 장고, 비파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또한 유곽(乳廓)의 띠 아래 부분과 좌우에도 생과 요고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비천상은 상원사 종 장식문양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종이 울리면 돌아다니는 스님들이 다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은은히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으니 그 중심체는 종에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원사의 종도 이 절의 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70호/ 10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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