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성, 랴오닝성
遼寧省(요녕성) |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남부의 성. 위치 :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남부. 면적 151,000km2. 인구 약 4138만(1997). 성도(省都)는 선양[瀋陽]. 1954년에 랴오시성[遼西省]과 랴오둥성[遼東省] 일부의 합병으로 랴오닝성이 성립되고, 1956년에 러허성[熱河省]의 동부를 병합하였다. 남동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북동쪽으로 지린성[吉林省], 북서쪽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및 허베이성[河北省]과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보하이해[渤海] 및 황해에 면한다. 요령성은 중국 동북지역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는 요하(遼河)가 흐르며 남쪽으로는 발해와 황해가 있고, 동북쪽은 길림성(吉林省)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은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남서쪽은 하북성(河北省)과 인접해 있다. 동남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다. 총 면적은 15만㎢ 가운데 약 1/3 이 평지이다. 지형은 해발 800m전후의 산지와 500m이하의 구릉지가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200m이하의 평원이 약 33%를, 그밖에 수면 및 기타지 역이 약 7%를 차지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철도간선 경합선이 성내에 뻗어 있으며 성도인 심양(瀋陽)과 대련(大連)사이는 전장 375㎞에 달하는 본격적인 고속도로가 뻗어 있어서 일반 도로에 비하면 퍽 좋은 편이다. 요령성의 도시 중에는 천연의 항구인 대련, 단동(丹東) 등이 있으며, 심양에는 최근에 새롭게 공항이 만들어졌다. 경제기술개발구로 지정된 대련을 비롯하여 철강의도시 안산 노천굴의 탄광으로 알려진 무순이 있어 중화학공업이 급속히 발전을 이루고 있다. 농업은 근애에 쌀이 많이 산출되고 사과며 포도의 재배도 활발하다. 요동만에 면한 해안지대에는 새우와 조개류의 양식을 많이하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은 대련에 수출하고 있다. 주요하천으로는 요하, 태자하, 낙동강, 대릉하, 대 양하 등이 있으며 이를 포함한 대·소 하천 360여 개가 요령성내에 흐르고 있다. 주요 산맥으로는 천산산맥이 북의 본계 마천령 남쪽의 연산관에서 남의 여순의 노철산까지 총 340㎞에 걸쳐 요령반도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장백산맥 의 일부분이 요령동북의 저산지대를 이루며 뻗어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산으로는 천산, 의무려산, 노노아호산, 봉황산(鳳凰山) 등이 있다. 기후는 임해지역으로 온대대륙성기후에 속하며 4계절이 뚜렷하다. 연평 균 기온은 7∼11℃이며 최고기온은 32℃, 최저기온은 -30 를 기록하고 있다. 무상기간은 평균 120∼130일에 이르고 있다. 지형은 남동부의 산지와 북서부의 구릉 ·고원 및 그 중간의 랴오허[遼河] 평원 등 3지역으로 구성된다. 랴오허 평원은 랴오허강이 형성한 해발고도 50m 미만의 충적평야로, 랴오허강 하구부의 랴오둥만[遼東灣] 연안 일대는 해발고도 2∼5m에 불과하여, 개척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저습지를 이루었다. 평원 동쪽은 100m급의 산봉이 이어지는 창바이[長白] 산지이고, 그 지맥인 첸산[千山]산맥이 500m 이하의 고도로 남서주(南西走)하여 랴오둥반도를 형성한다. 랴오둥반도는 침강지괴(沈降地塊)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어, 남동쪽의 창산[長山] 군도를 비롯하여, 연안에 많은 섬들이 분포한다. 평원 북서부는 네이멍구 고원으로 이어지는 해발고도 400m를 넘는 구릉 ·고원지대인데, 그 남서쪽의 해안평야는 이른바 랴오시주랑[遼西走廊]을 이루어 화베이[華北]와의 주요 교통로가 되고 있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해안지대는 비교적 온난다우하다. 1월 평균기온은 동부 산지에서 -20℃, 북부평야에서 -15℃, 남단부에서 -5℃이나, 7월 평균기온은 평야부에서 24∼26℃로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강수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적어져서, 동부산지에서 1,000 mm 이상, 평야부에서 600∼700mm, 서부에서 500mm의 연강수량을 보이나, 그 대부분이 여름에 내려, 농업에는 비교적 유리하다. 한편, 3∼5월에는 속칭 몽골풍으로 불리는 서풍이 불어 심한 풍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고래로 화베이지방과의 관계가 깊었고, 부여 이래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으며, 고려 이후 한국과 국경을 접하기 때문에 유사 이래 한국과 중국 사이의 정치 ·문화 교류는 거의 이곳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주민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回族] 및 한국인 등이 산다. 랴오허 평원은 둥베이 지방에서 농업개발의 역사가 가장 오랜 곳으로, 수수 ·조 ·옥수수 ·쌀 등 자급작물 외에 콩 ·땅콩 ·목화 등 상품작물의 생산이 많고, 랴오둥만 연안에서는 사과를 비롯한 과실류, 동부의 펑청[鳳城] ·슈옌[岫岩]을 중심으로 작잠사(臨蠶絲)의 생산이 많다. 동부산지의 압록강 및 훈허강[渾河] 유역은 삼림지대를 이루어 임업이 성하고, 연안부에서는 다롄[大連] ·좡허[庄河] ·슝웨청[熊岳城] 및 창산 군도의 여러 어항을 중심으로 어업이 성하며, 랴오둥만 동안(東岸)에는 염전이 많다. 광업은 안산[鞍山] ·번시[本溪] ·랴오양[遼陽]의 철광석, 푸순[撫順] ·베이퍄오[北票] ·푸신[阜新] 등지의 석탄, 다스차오[大石橋]의 마그네사이트 외에 망간 ·몰리브덴 ·아연 ·구리 ·유모셰일 등 다종류의 자원 매장량과 생산량이 많다. 그들 자원과 수풍(水豊)댐을 비롯한 수력의 개발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의 발달이 현저하여, 중국 제일의 중화학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안산에는 중국 유수의 철강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제철공업 외에 기계 ·화학 ·내화벽돌 등 여러 부문의 공장들이 입지하고 있다. 번시 ·선양에도 제철공업이 발달하고, 선양에는 알루미늄 ·구리 제련소, 푸순에는 석탄화학 ·인조석유 공장이 있다. 기계공업은 공작기계 ·농업기계 ·광산기계 ·전기기기 ·정밀기계 ·차량 ·조선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고, 화학 ·제지 ·방직 ·제사 ·식품 ·요업 등 공업도 성하다. 중국에서 철도망이 가장 발달한 성(省)으로, 선산[瀋山:瀋陽山海關] ·창다[長大:長春~大連] ·선단[瀋丹:瀋陽∼丹東] 등 간선철도와 많은 지선이 각지를 잇고, 버스 교통망도 정비되어 가고 있다. 해운은 다롄[大連]을 비롯하여 잉커우[營口] ·후루다오[葫蘆島] ·단둥[丹東] 등 항구가 널리 이용되고, 항공로는 선양을 중심으로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 ·베이징[北京] ·평양 등지와 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남부의 성. 면적 15만 km2. 인구 약 3990만(1992). 성도(省都)는 선양[瀋陽]. 1954년에 랴오시성[遼西省]과 랴오둥성[遼東省] 일부의 합병으로 랴오닝성이 성립되고, 56년에 러허성[熱河省]의 동부를 병합하였다. 남동쪽으로 압록강을 끼고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북동쪽으로 지린성[吉林省], 북서쪽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및 허베이성[河北省]과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보하이해[渤海] 및 황해에 면한다. 안산에는 중국 유수의 철강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제철공업 외에 기계·화학·내화벽돌 등 여러 부문의 공장들이 입지하고 있다. 번시·선양에도 제철공업이 발달하고, 선양에는 알루미늄·구리 제련소, 푸순에는 석탄화학·인조석유 공장이 있다. 기계공업은 공작기계·농업기계·광산기계·전기기기·정밀기계·차량·조선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고, 화학·제지·방직·제사·식품·요업 등 공업도 성하다.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개발되어 한대(漢代)에는 요동군(遼東郡)에 속했고, 뒤에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에 속해 있다가 다시 당(唐)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심주(瀋州)가 되었다. 그 후 발해(渤海)에 속했다가 요(遼)·금(金)시대에는 동경로(東京路), 원대(元代)에는 심양로(瀋陽路)가 설치되었으며, 명(明)은 변경의 요지로 삼아 심양위(瀋陽衛)를 두었다. 청조(淸朝)가 일어나자 1625년 랴오양[遼陽]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경(盛京)이라 개칭하였으며, 1644년에 베이징을 국도로 정한 뒤에는 이 곳을 배도(陪都)로 삼고, 1657년에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였다. 19세기 말에 러시아와 일본의 둥베이 침략이 시작되자 선양은 침략의 목표가 되고, 러일전쟁[露日戰爭:1904∼1905] 때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청조가 멸망하자 둥베이는 지방 군벌(軍閥)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고, 선양은 그 두목 장쭤린[張作霖] 정권의 본거지가 되었다. 1932년에 일본에 의해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면서 도시명이 봉천시(市)로 개칭되었고, 그 후 일본의 둥베이 지배의 주요기지로 발전하여 만주국 제1의 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만주국이 붕괴되자 지명이 다시 선양으로 바뀌었으며 창춘[長春]·다롄[大連]·산하이관[山海關]·단둥[丹東]·지린[吉林]으로 통하는 주요철도가 분기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근에 푸순탄전[撫順炭田] 및 번치[本溪]·안산[鞍山] 등 탄전·철산이 있어, 기계·전기기기·기관차·자동차·착유(搾油)·제분·방적·화학 등의 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부근 일대는 중국 최대의 중화학공업지대가 되어 있다. 시가지는 동부의 고궁을 중심으로 성벽에 둘러싸인 구성내(舊城內),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서부의 상가·주택가·문교지구, 중간의 관청가, 창춘~다롄 철도 서쪽의 공장지대 및 노동자 주택지구와 제2차 세계대전 후 북·동·남부로 확산된 신시가지 등으로 구분된다. 시내에는 청대의 고궁·동릉(東陵)·북릉(北陵) 및 둥베이 라마교의 본산인 황쓰사 등 사적·명소가 많으며, 랴오닝대학·둥베이재정경제대학·둥베이의과대학 등이 있다. 심양은 요령성의 수도이고 북경과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오늘날 중국 동북공업지대의 중심이자 교통의 축이기도 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중심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총 면적은 약 8,500㎢이며, 지리적으로 요하평원의 중부, 혼하(渾河)의 북안에 자리잡고 있다. 심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로 이미 전한(前漢)시대(기원전 206년∼서기 24년)에 초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 원(元)대에 심양로(瀋陽路)라 불리게 되었고, 『심양』이라는 도시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이곳을 도읍으로 설치, 성경(盛京)으로 이름 붙였으나 청의 북경천도와 함께 개칭, 1945년에 다시 심양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류부에서 다량의 토사가 유출되어 하구부의 랴오둥만[遼東灣]에 광대한 삼각주를 형성한다. 하류부에서는 자주 홍수가 일어났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치수공사가 이루어졌다. 또, 서랴오허강 연안지대에서도 풍사(風砂)의 피해가 컸으나 대규모의 방풍림이 조성되어 판산[盤山] ·진셴[錦縣] 부근의 범람원은 광대한 농경지로 개간되고 있다. 원래 둥베이 지방 남부의 주요 내륙수로가 되어왔으나, 철도가 개통된 뒤 수운(水運)은 쇠퇴되고, 현재는 농업용수원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보하이해 [渤海(발해)] 다롄 [大連(대연), Dalian] 러일전쟁 후 일본이 50여 년 동안 조차하여 자유항으로 하고, 남만주철도 본사를 이곳에 두어 만주 경략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반환되었다. 1950년 서쪽의 뤼순[旅順]과 합병하여 뤼다[旅大]라고 불렀다가, 1981년에 다롄으로 고쳤다. 둥베이[東北]지구의 중요한 공업지대와 항구도시 및 중국 외무해항(外貿海港)과 어업기지로 알려져 있다. 조선·기계·화공·제유·방직·복장가공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선다철도[瀋大鐵道:瀋陽∼大連]의 종점이며, 공항은 홍콩 등을 운항하는 국내선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54개의 중학교와 다롄이공대학[大連理工大學]·다롄해사대학[大連海事大學] 등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해양박물관·라오후탄[老虎灘]·방추이도[捧槌島] 등이 있다. 랴오둥 반도 끝의 항구도시 다롄은 원래 작은 어촌이었다. 도시로서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지만 많은 조계지의 하나로, 거리마다 그 분위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중국의 5대 대외무역 도시의 하나이며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대련시는 요동 반도 최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기후가 비교적 적합하여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온난한 지역이다. 분명한 해양성 기후에서 대륙성 기후로 넘어가는 해안 기후의 특징이 있다. 년 강수량은 500~1000mm 정도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계절은 여름이다. 대련시의 봄은 매화, 복숭아꽃, 사과꽃등이 만발하며 5월 하순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도화성' 이란 명명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전시장이 마련된다. 여름 평균 기온은 22도 정도 강수량은 350~1000mm 이며 대련 해변은 관광지역과 유람(산,바다,성등) 지로 유명하다. 대련의 자연공원 -- 또한 이곳은 사과로 유명하며 여름에 찌는 듯한 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는 해양성 기후여서 살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항구는 부동항 (不凍港)으로 상해와 더불어 중국 굴지의 양항인 동시에 대정(大正)새우, 복, 오징어, 해삼, 전복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어업기지이기도 하다. 대련으로의 여행은 사계절 모두 좋지만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는 5∼6월 사이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때가 되면 거리에 아카시아가 활짝 피어나 아카시아 거리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대련의 자연자원은 해양자원이 가장 유명하다. 주로 해삼, 포어, 대하, 해파리, 가재등등이다. 어류중에서도 갈치, 작은조기, 가물치 등등이 유명하다. 대련은 조류도 유명하여 그 종류도 또한 다양하다. 여순노철사는 "조산"으로 유명하며 근처 해역에는 국내외에 유명한 '사도' 가 있다.금강석, 석회암등 광산자원이 풍부하며, 그중 금강석의 채석량은 전국 총 채석량의 반을 차지한다. 경공업 부분에서는 유리기기(그릇), 방직품, 의류등의 유명 브렌드가 많다. 대련은 중국의 유명한 과수산지이다. 사과재배가 가장 많고 품종이 100여개가 넘는다. 또 황도와 앵두, 포도, 배, 딸기등이 유명하다. 대련은 또한 특이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고전적인 양식과 서양 현대식 건물등이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한다. 대련의 년내 도시 행사중 유명한 것이 "중화연화폭죽 개나리 잔치", "평곡얼음 등전" 와 "대련 수출상품 교역회"등 이미 국내외 고객 가운데 유명한 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대련 경제 기술개발구와 금석탄 국가 관광지역도 세련된 건축, 우아한 아름다운 환경으로 많은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 신시가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청 ·일전쟁 후,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 의해 일본에 할양(割讓)되었다가 ‘3국간섭’으로 다시 반환되었다. 그 후 남단부의 관동주(關東州)가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었으나, 러 ·일전쟁의 결과, 포츠머스조약 및 베이징[北京]조약에 의해 관동주는 일본 조차지가 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일본은 만주경략(滿洲經略)에 착수하였다. 일본의 통치는 약 40년 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차권(租借權)은 소멸되고 다시 중국 영토로 복귀되었다. 반도 선단부에 있는 다롄[大連]은 둥베이 지방의 문호를 이루는 주요 무역항이고, 뤼순[旅順]에는 해군기지가 있다. 옥수수 ·땅콩 ·목화 ·사과 ·채소 등 농업과 어업 ·천일제염업이 성하고, 다롄은 중국의 주요 중공업도시의 하나이다. 연평균온도 8.5℃, 연강우량 670~1,200mm이다. 항구는 흘수선(吃水線:배의 물에 잠기는 부분과 잠기지 않는 부분을 가르는 선)이 3m인 배까지 입항이 가능하며, 목재·콩·콩기름 등을 수출한다. 부근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작잠사(蠶絲)를 원료로 하는 견직물공업 외에 제지·비누제조·철강·기계 공업이 활발하다.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한 국경도시로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 된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 단동을 통과하고 있다. 볼거리로는 압록강공원과 금강산공원이 있는데, 압록강공원은 북한과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의 강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압록강대교가 아름답기 그지 없으며, 압록강을 따라 모터보트나 소형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금강산공원은 시내 북서쪽에 있는 공원으로 여기에서는 북한까지도 볼 수 있다. 요령 윤가촌 유적 [遼寧尹家村遺蹟] 윤가촌유적은 윤가촌 남서쪽의 남하 북쪽 기슭에 있으며, 중국의 해방을 전후해 2차에 걸쳐 조사되었다. 1차조사는 해방 전 지역주민에 의해 우연히 칼[劍] ·청동도끼 ·칼자루 각각 1개씩이 발견되어 이것이 조사의 계기가 되었다. 2차조사는 1964년에 총 280 m2에 달하는 지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많은 무덤과 동시기에 속하는 문화층을 확인하였다. 여기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3개의 문화층이 알려졌다. 제일 윗층(제1층)은 현재의 경작층이었으며, 유물포함층은 2 ·3층이었으므로 편의상 이를 상하층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아래층은 다시 1 ·2기층으로 나뉘는데 1기층(하층)에서는 3기의 화장(火葬)한 작은 움무덤과 8기의 움[土坑]이 나왔다. 여기서는 주로 모래가 섞인 갈색 ·회갈색의 아가리가 넓은 항아리, 바리, 굽접시, 잔 등이 나왔다. 이 외에 약간의 석기와 골기 ·가락바퀴 등이 나왔다. 2기층에서는 12호 돌널무덤과 3호, 11호 움이 나왔다. 무덤은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나무관을 넣은 다음 나무관과 구덩이 사이에 막돌을 채우고 다시 나무널 위에 막돌을 덮은 짜임새이다. 이 무덤에서는 청동단검 ·곤봉대가리 ·굽접시 ·단지 등 유물이 나왔으며 문화층에서는 나무그루모양 손잡이그릇, 항아리, 도끼 거푸집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다. 청동단검의 몸체는 좁고 길며 비파형동검에서 볼 수 있는 날 좌우의 돌기부가 없다. 이것은 이 유적의 단검이 이미 비파형동검에서 벗어나 좁은놋단검[細形銅劍]으로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문화층에서는 BC 1000년기 전반기에 흔하던 미송리형(美松里形)토기는 보이지 않고 그 후기에 해당하는 나무그루모양 손잡이그릇이 새로 나타난다. 따라서 윤가촌 유적 아래층 2기문화는 유물갖춤새로 보아 BC 1000년기 전반기의 비파형동검 관계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새로운 좁은놋단검 관계문화(BC 5세기∼BC 4세기)라는 것을 확증하여 준다. 한편 윗문화층에는 여러 기의 큰 움무덤과 독무덤 그리고 2개의 움을 발굴 정리하였다. 큰 움무덤들은 모두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한 사람씩 묻었는데 바닥에는 나무널이 썩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독무덤은 질그릇을 2개 또는 3개 맞붙여 관(棺)을 이룬 것과 2개의 질그릇 아가리 사이를 큰 기와로 이어 관을 만든 것들이다. 이 문화층에서 나온 유물의 대부분은 단지 ·보시기 ·바리 ·접시 등 회색 ·회흙색 ·갈색의 무늬 없는 토기와 노끈무늬그릇이며, 그 밖에 기와조각, 청동활촉, 16호무덤에서 알려진 수정구슬이 있다. 움무덤에서 나온 단지나 독무덤의 널로 쓴 토기 가운데는 한반도 서북지방 세죽리(細竹里)유적 철기시대층의 토기와 같이 모래나 활석가루를 섞은 것이 있다. 윤가촌유적 윗문화층의 토기와 세죽리유적 철기시대층의 토기에 보이는 이 같은 공통성은 두 유적을 남긴 주민들 사이의 깊은 문화적 연계를 말해 주며, 이는 고조선 주민집단의 분포나 세력범위와도 관련하여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형성 연대는 BC 3세기∼BC 2세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랴오둥반도의 서안, 남단 가까운 쥬완[鳩灣]의 중앙에 돌출한 반도 모양의 구릉 사면(斜面)에 있다. 1933년에 동아고고학회가 발굴 조사하여, 두꺼운 패층(貝層) 밑에서 집터 3기와 약간의 아궁이터를 발견하였다. 집터는 벽의 기초석렬(基礎石列)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직사각형의 설계로 된 정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에는 다수의 석기 ·골각기 ·토기 등 외에 청동소판(靑銅小板)의 조각과 찬(鑽:송곳으로 뚫은 흔적)과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복골(卜骨)도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 ·식칼이 많으며, 유공석부(有孔石斧) ·합인석부(蛤刃石斧) 등이 있고, 특히 생선 모양의 돌검은 주목을 끈다. 토기는 흑도 또는 갈색토기류인데 항아리 ·굽다리접시 ·역(:음식을 익히는 데 쓰는 그릇) 등을 포함한다. 토기조각을 가공한 가락바퀴[紡錘車]의 예도 많다. 그리고 돼지 ·개 등의 가축, 사슴 ·이리 등의 야생동물 그리고, 닭으로 보이는 새 등의 뼈도 출토되었다. 유구(遺構) ·유물을 통하여 이곳에서 정주농경(定住農耕)이 영위되었음과, 가축 사육 및 어업에 종사한 당시의 생활 등을 상정할 수 있다. [경제개황] |